백제 중방문화를 꽃피우다. 정읍 고사부리성, 축성술의 백미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300003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고부면 고부리
시대 고대/삼국 시대/백제
집필자 이문형

[정의]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고부면 고부리에 있는 백제 중방문화를 꽃피운 정읍 고사부리성.

[개설]

백제 성왕은 538년 사비 천도 후, 중앙과 지방에 대한 통치 체제를 일신한다. 특히 지방에 5개의 방(方)을 두고 아래에 군(郡)과 성(城)을 둔 방군성 체제를 따랐다. 기록에 의하면 백제는 당시 5방 37군 200성으로 지방을 편제하였던 것으로 전한다. 지방의 5방 가운데 중앙에 해당하는 중방성은 현재의 정읍[고부] 고사부리성[옛 고부구읍성]으로 밝혀졌다. 문화권이란 ‘공통된 특징을 가지는 복합체로서의 하나의 문화가 지리적으로 분포하는 범위’을 말하는데 백제 중방문화는 ‘백제 사비기 설치된 중방성인 정읍 고사부리성을 중심으로 그 속현의 문화’라 할 수 있으며, 이러한 문화의 공간적 범위를 중방문화권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 정읍을 중심으로 김제, 부안, 고창[흥덕]이 중방문화권에 해당한다.

[기록 속의 중방문화권]

『삼국사기(三國史記)』 권 제36 지리3에 따르면 고부군(古阜郡)은 백제 시대 고사부리군(古沙夫里郡)으로 고사부리군에 속하였던 영현은 3곳인데, 부녕현은 개화[부안]이며, 희안현은 보안[부안], 상질현은 흥덕[고창]으로 확인된다. 『삼국사기』 권 제37 지리4에서 웅진도독부가 설치한 7주 중 고사주(古四州)에 대하여 살펴보면 대산현은 태인[정읍], 벽성현[김제], 좌찬현[고창 흥덕], 순모현[김제 만경]으로 기록된 것으로 보아 당시 백제 중방성의 관할은 정읍, 김제, 부안, 고창[흥덕] 일대로 상정할 수 있다. 한편, 김제 벽골제 중수비에 의하면 5개의 수문을 통하여 각지로 물을 공급하였는데 수여거는 만경현 남쪽[김제], 장생거는 만경현 서쪽으로, 중심거의 물줄기는 고부[정읍]의 북쪽과 부령의 동쪽으로, 경장거와 유통거는 인의현 서쪽에 이른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와 같은 기록으로 중방성을 중심으로 인근 주변 지역은 정치·경제적으로 하나의 문화권[중방]을 이루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중방성의 치소, 정읍 고사부리성]

고부구읍성(古阜舊邑城)인 정읍 고사부리성은 2005년 발굴 조사 과정에서 백제 시대의 ‘상부(上阝)상항(上巷)’명을 비롯한 각종 인장와가 출토되었고 2008년 5월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정읍 고사부리성에 대한 최초의 조사는 20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원광대학교 박물관에서 실시한 지표 조사를 통하여 문지, 우물, 건물지 등과 함께 백제 토기편이 수습되어 백제 시대에 초축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하였다. 이후 2002년 민락정터 조사를 시작으로 2003~2019년까지 7차례에 걸쳐 조사를 통하여 문지와 성벽, 그리고 건물지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짐과 동시에 2010년부터 성벽에 대한 보수 정비도 병행되었다.

정읍 고사부리성은 행정 구역상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고부면 고부리 산1-1 일대에 있다. 높이 133m의 성황산과 서쪽 봉우리[높이 126m], 두 봉우리를 감싸고 축조된 포곡식 산성이다. 고사부리성의 평면 형태는 타원형으로 성벽의 둘레는 1,055m, 동서 길이 418m, 남북 너비 200m, 내부 면적은 6만 3484㎡이다.

정읍 고사부리성의 성벽 축조는 기본적으로 편축[내탁] 공법으로 축조하였으며, 지형에 따라 협축 공법을 사용하거나 혹은 편축과 협축 두 가지 공법을 혼용하여 축조하였다. 기반층 대부분이 암반층으로 이루어진 집수정지 주변 성벽은 협축 공법으로 축조되었으며 축조된 곳은 성 내부에서 가장 낮은 곳에 있어 성 내부의 물이 성 외부로 배출되도록 하였다. 상대적으로 집수정지보다 지형이 평탄하고 습기의 영향을 적게 받는 남성벽이나 남서성벽의 경우 완전한 편축 공법으로 축조하고 있다. 그리고 약간의 경사면에 있는 북문지 주변의 북서·북동·동성벽은 하단부는 편축식으로 축조하였지만 외벽이 내벽과 수평을 이루는 지점에서는 협축식으로 축조하여 지형에 따라 편축과 협축 공법을 혼용하였음이 확인되었다. 성내의 지형이 높고 성외의 지형이 낮아 성내의 지면 높이까지 외벽을 편축 공법으로 축조하고 성내의 지면에서는 내·외벽을 협축 공법으로 축조하였는데, 이로써 성벽을 축조하는 데 있어 지형을 고려하여 지형에 맞는 최상의 공법을 적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성벽의 축조는 구 지표면을 정지하여 기반층 위에 축조하였으며, 성벽이 압력에 밀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생토면 혹은 암반층을 ‘ㄴ’자상의 밀림방지턱을 만들고 성의 주춧돌을 시설하였다. 이와 같은 밀림방지턱을 만들어 성벽의 주춧돌을 놓는 방식은 주로 백제 석축성에서 확인되는 것으로 부여 나성, 익산토성, 순천 검단산성, 여수 고락산성 등지에서 확인되었다. 이와 같은 기법은 성벽의 하중을 효과적으로 분산하고 내부의 토압에 의하여 성돌이 밀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으로 기반층이 암반을 지나는 구간에 적용하였다. 또한 그렝이기법을 동시에 활용하였으며 일부 구간에서는 성토 기법을 적용하였다.

성벽에 사용된 면석(面石)의 경우 외성벽의 겅우 1:1의 방형 석재와 3:2 또는 2:1의 잘 다듬은 장방형 석재를 이용하여 수평을 맞추어 정연하게 쌓아 올렸으며 상부로 올라갈수록 약간 뒤로 물려 들여쌓기하였다. 성벽은 틈새가 거의 확인되지 않을 만큼 ‘품(品)’자형 쌓기로 성돌의 접합면은 그렝이기법으로 정교하게 치석(治石)하여 결구하였다. 내성벽은 외성벽과 달리 상대적으로 장방형 석재와 방형 석재가 뒤섞여 있고 전반적으로 3:1의 세장방형이 석재도 다수 사용되었는데 내성벽 축조에는 그렝이기법이 거의 확인되지 않는 반면, 외성벽에서 보이지 않았던 쐐기돌이 확인된다. 그리고 외성벽과 내성벽 사이의 내부에는 석재를 채워 견고함을 유지하였다. 성벽의 치석한 석재의 사용, 견고한 축성으로 볼 때 많은 시간과 노동력이 투입된 것으로 보아 정읍 고사부리성의 중요성을 짐작할 수 있다.

정읍 고사부리성에서는 모두 3개의 문지(門址)가 확인되었다. 백제 산성의 문지는 대부분 능선의 정상부나 계곡의 중심부에서 약간 비켜난 곳, 즉 한쪽으로 약간 치우친 곳에 시설되는데 정읍 고사부리성에서 확인된 문지 역시 유사한 특징을 보인다. 특히 정읍 고사부리성의 서문지와 북문지는 해당 성벽 구간 한편에 치우쳐 시설되어 있는데, 출입의 편리성보다는 방어에 유리함을 택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특히 북문지와 서문지는 방어에 유리한 어긋문으로 밝혀졌다. 어긋문은 성문을 직접 공격할 수 없도록 문을 어긋나게 축조하는 것으로 순창 대모산성[북문지]와 대전 계족산성[남문지] 등에서도 보고된 바 있다. 북문지 어긋문의 폭은 3m, 서문지의 폭은 5m 내외이며, 남문지는 현문식으로 확인되었다. 문지 바닥면에서 확인된 기둥 구멍으로 보아 서문지는 정면 1칸, 측면 3칸, 남문지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구조를 가진 문루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산성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물(水)과 관련된 집수지(集水址)는 양 봉우리의 북쪽 계곡으로 남문지와 반대되는 가장 낮은 저지대에서 확인되었다. 집수지는 백제 시대에 처음 시설된 후 통일 신라 시대에 한 차례 개축과 보축이 이루어진 것으로 밝혀졌다. 백제 시대 집수지의 평면 형태는 방형으로 [잔존]규모는 길이 8.5m, 너비 5m 내외이다. 통일 신라 시대의 확장 보수된 규모는 길이 13.8m, 너비 7.9m, 깊이 3m 내외로 장방형의 평면 형태이다. 집수지의 바닥 동쪽과 북쪽 벽면에서는 삿자리가 확인되었는데, 삿자리를 벽에 깐 다음 회갈색의 점토를 바르고 벽석을 축조한 것으로 보아 방수 처리를 위한 방법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밖에도 남문지와 북문지 주변에도 샘[우물]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사부리성에 대한 수차례의 발굴 조사 결과 백제 시대부터 조선 시대에 해당하는 다양한 시기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특히, 백제 시대의 특징적인 유물로는 중방성으로 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상부(上阝)상항(上巷)’명 명문 인각와[인장와]를 꼽을 수 있다. 북문지 북벽 측의 성토층에서 두 점이 편으로 출토된 인각와는 장방형 곽 안에 좌서(左書)의 ‘상부(上阝)상항(上巷)’ 글자가 세로 방향으로 찍혀 있다. 비록 두 점이 완전한 형태는 아니지만 서로 간의 글자체가 동일한 것으로 보아 동일한 인장에 의하여 날인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상부상항(上阝上巷)’은 백제의 수도 5부 5항 제도의 명칭이 새겨진 인각와 가운데 5항의 명칭이 새겨진 유일한 사례이다. 또한 집수지 내에서는 선각으로 그려진 백제의 기마무사 기와편이 출토되어 당시 백제에도 기마무사가 실재하고 있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이외에도 백제 시대의 평기와를 비롯하여 삼족토기, 병형토기, 항아리편 등이 출토되었다. 출토된 백제 시대의 유물로 볼 때 백제 고사부리성의 중심 시기는 사비 도읍기인 6세기 중엽부터 7세기 중엽으로 추정된다.

[중방성인 정읍 고사부리성의 의미와 역할]

문헌 기록과 동진강 유역을 중심으로 분포한 백제 유적으로 볼 때 중방성의 지역은 정읍을 필두로 하여 김제-태인-부안-고창[흥덕] 지역으로 추정된다. 고부에 백제의 중방성을 둔 연유는 당시 백제 영역의 중앙에 자리한 고부의 지리적 위치 외에도 김제 벽골제의 경제력, 동진강과 만경강을 통한 교통의 편리성 등이 종합적으로 고려된 결과로 보인다. 즉, 정읍 고사부리성[중방성]은 서해에서 내륙으로 들어오는 주요 교통로를 관장하고 주변 지역과의 상호 연계를 통하여 지방 통치를 원활하게 하는 역할을 담당하였을 것이다. 정읍 고사부리성이 있는 고부 지역은 동진강과 지류를 통하여 북으로는 김제, 남으로는 고창 흥덕까지 연계되며, 정읍천을 통하여 동진강의 상류인 산외면 지역을 지나 섬진강 유역과도 연결되는 교통의 결절 지역이다. 따라서 중방성은 주요 교통로를 관장하고 동진강 수계와 내륙 방어선을 구축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정읍 고사부리성중방 일대는 대부분 평야 지대로 다른 지역에 비해 월등한 생산력을 지닌 농경[생산]의 보고이다. 결과적으로 정읍 고사부리성 일대는 평야 지대의 생산력, 수로 교통로상의 접근성을 토대로 하여 경제력과 군사 거점으로서의 중요성이 부각된 결과이다. 또한 7세기 무왕 시기 익산 지역 운영과 함께 동방성과 중방성을 연결하여 지방 통치의 효율화를 극대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결과적으로 고사부리성, 즉 중방은 국토의 중앙부라는 지리적 장점을 바탕으로 한 수로와 육로상의 교통 결절 지역이면서 주변 평야 지대에서 생산된 경제력을 바탕으로 주변 다른 방성들과의 연계를 통하여 효율적으로 백제 시대 지방을 통치한 측면에서 중요성을 엿볼 수 있다.

[중방 사람들의 안식처, 정읍 은선리와 도계리 고분군]

중방성인 정읍 고사부리성의 북쪽에 있는 영원면 천태산 일원, 은선리도계리 일대에는 백제 시대 고분 수백여 기가 분포하고 있다. 현재까지 정밀 지표 조사, 발굴 조사 등을 통하여 영원면 은선리·운학리, 덕천면 도계리, 고부면 장문리 등 모두 16개소 270여 기의 고분이 분포하는 것으로 보고되었다. 그러나 최근 일부 지역에서 기존에 보고되지 않은 다른 고분이 추가로 확인되고 있다. 대규모 백제 시대 고분군의 분포는 현재까지 부여 염창리 고분군과 남원 초촌리 고분군에서만 알려져 있었다. 정읍 지역의 백제 고분은 2018년 일부 지역[면적 12만 9163㎡, 60여 기]이 정읍 은선리와 도계리 고분군이라는 명칭으로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1973년 실측 보고된 10기의 고분을 포함하여 2008년, 2016년 두 차례 발굴 조사로 고분의 형식은 횡혈식석실묘[굴식돌방무덤]로 밝혀졌다. 석실의 유형은 대다수가 백제 사비 시기에 축조된 전형적인 판석조의 고임식 천장을 지닌 무덤으로 일부에서는 웅진기의 할석으로 축조된 석실이 확인되고 있다. 운학리 고분군에서 출토된 중국 진식대구의 용문투조과판으로 보아 사비 시기 이전부터 백제 중앙에서 정읍 지역을 중요하게 인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이는 재지 세력이 성장하여 백제 중앙과 깊은 관련을 맺은 것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정읍 지역이 차지하는 수로, 육로상의 교통 요충지, 평야를 기반으로 하는 농경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백제 사비기 지방 지배 체제의 핵심인 중방성이 현재의 정읍 고사부리성에 설치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정읍 은선리와 도계리 고분군은 중방성인 정읍 고사부리성의 운영 시기와 맞물려 백제 사비 시기에 집중적으로 조영된 것으로 당시 중방성의 핵심 구성원들이 백제 중앙과 지방 사회에 편제되어 활동하다가 사후에 남긴 무덤으로 볼 수 있다.

[중방성과 관련된 주변 유적]

1. 김제 벽골제[중방의 경제적 기반]

벽골제는 우리나라 최고 최대의 수리 시설로 알려진 농경 문화의 대표적인 유적이다. 현재 부량면 포교리를 기점으로 남쪽 월송리까지 남북으로 약 3㎞의 제방이 남아 있다. 발굴 조사 결과 제방은 모두 3차례에 걸쳐 축조된 것으로 확인되었으며, 공법에는 초낭을 비롯하여 풍납토성에서 사용된 부엽공법 등이 이용되었다. 그리고 제방 축조 이전에 자생하던 식물 유체를 통한 방사선 탄소 연대 측정 결과 330~374년이라는 결과가 도출되어 문헌 기록과 시축 연대가 일치하는 것을 확인하였다.

2. 부안 백산성[물류 유통의 중심]

동진강고부천의 합수 지점에 자리한 백산성은 주안군 백산면 용계리 백산[높이 47m]의 정상부를 감싼 테뫼식 산성으로 전체 둘레가 1,064m에 이른다. 백산은 동진강 하구 충적 평야 가운데 섬처럼 독립한 산 정상에 있다. 백산의 정상부에서는 동서남북 사방의 교통로와 동진강 변을 포함하여 부안, 고부 방면의 조망이 용이하다. 3차례에 걸친 발굴 조사 결과 3중의 환호 시설 내에 원삼국 시대부터 백제 시대까지 주거지가 조사되었다. 특히, 쌀, 밀, 보리, 조, 콩, 팥 등의 탄화된 다양한 곡물이 출토되어 농산물의 집산지로서 유통의 거점으로 해석되고 있다. 이는 김제의 벽골제와 구부[정읍] 눌제의 수로의 중간 지점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3. 고창 오호리 유적[관인(官印)출토지]

오호리 유적은 고창군 흥덕면에 있는 고분군으로 4기의 횡혈식석실묘[굴식돌방무덤]가 조사되었다. 그중 3호 석실묘에서 청동인장이 출토되었다. 인장에는 세로로 두 자씩 총 6자 ‘○의장군지인(○義將軍之印)’이 좌서(左書)로 음각되었다. 현재까지 삼국 시대 인장의 유일한 출토 사례로, 중국 남조에서 출토된 ‘복의장군지인(伏義將軍之印)’과 동일한 것으로 보고 있다. 중국의 복의장군 관직의 설치 연대[529년]의 근거를 들어 6세기 초 이후에 백제 중앙의 행정 제도가 지방에 실현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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