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300431
한자 壬辰倭亂
영어공식명칭 Imjinwaeran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송만오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592년연표보기 - 임진왜란 발발
발단 시기/일시 1592년 4월 13일 - 일본군 부산포 상륙
전개 시기/일시 1592년 4월 14일 - 일본군 부산진 공격
전개 시기/일시 1592년 4월 15일 - 일본군 동래성 공격
전개 시기/일시 1592년 6월 22일 - 임진왜란으로 태조 어진 내장산 용굴암으로 이전
전개 시기/일시 1592년 7월 1일 - 임진왜란으로 『조선왕조실록』 내장산 은봉암으로 이전
전개 시기/일시 1592년 7월 - 웅치 전투 발발
전개 시기/일시 1593년 - 임진왜란으로 태조 어진과 『조선왕조실록』 충청도 아산으로 이전
전개 시기/일시 1597년 - 정유재란 발발
전개 시기/일시 1597년 9월 15일~1597년 9월 16일 - 시현 전투 발발

[정의]

1592년과 1597년 두 차례에 걸쳐 정읍 지역을 비롯한 조선을 침략한 일본과 벌인 전쟁.

[개설]

1592년(선조 25)과 1597년(선조 30) 등 두 차례에 걸친 일본의 침입으로 현재의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지역은 큰 피해를 당하였다. 하지만 관군(官軍)과 의병(義兵)의 활동으로 일본의 침입을 물리칠 수 있었다.

[역사적 배경]

16세기 군웅할거(群雄割據)의 전국 시대를 마감하고 일본 전역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대륙 침략의 야망을 품고 일본군의 조선 통과를 조선 조정에 요청하였다. 하지만 당시 중원을 차지하고 있는 명(明)나라를 종주국으로 삼고 있던 조선은 일본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리하여 1592년(선조 24) 4월 13일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끄는 일본군이 부산포에 상륙하면서 임진왜란이 시작되었다.

[경과]

일본군은 부산포에 상륙한 다음날인 1592년 4월 14일 부산진(釜山鎭)으로 진격하였다. 이에 부산진첨사(釜山鎭僉使) 정발(鄭撥)이 온 힘을 다하여 일본군의 침략을 막아내고자 노력하였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그리고 1592년 4월 15일 일본군은 동래성(東萊城)을 공격하였다. 이때도 동래부사(東萊府使) 송상현(宋象賢)이 죽음을 각오하고 왜적에 저항하였지만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 결과 부산진과 동래성은 일본군의 수중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이후 일본군은 두 개의 부대로 나누어, 하나는 서울을 향하여 북상(北上)하였고, 하나는 남해안을 따라 서쪽으로 진격하였다. 그리하여 남도(南道) 일대가 일본군의 유린 아래에 빠지게 되었다. 한편 북상하는 왜군은 중로(中路)와 우로(右路)와 좌로(左路) 등 세 곳으로 분산하여 진격하였다. 고니시 유키나가가 거느렸던 중로의 제1군은 대구를 거쳐 충주에 이르고, 2군은 영천(永川)을 거쳐 충주에 이른 후, 1군과 합세하여 서울로 진격하였으며, 우로의 3군은 김해를 거쳐 북상하였다. 이후 상주(尙州)와 충주에서 조선군을 무찌른 일본군은 서울로 진격하여, 1592년 5월 3일, 한성(漢城)을 함락시켰다. 선조는 일본군이 침입이 있기 이전에 세자와 함께 도성을 떠났다.

한편 고바야카와 다카카케[小早川隆景]가 이끄는 일본군은 이치(梨峙)와 웅치(熊峙)를 넘어 전주 방면을 진격하고자 하였다. 1592년 7월 초 전라도 도절제사로 있던 권율(權慄)은 동복현감 황진(黃進)이 거느린 관군(官軍) 1,500명과 더불어 이치를 방어하였고, 김제군수로 있던 정담은 웅치를 막도록 하였다. 순창군수(淳昌郡守) 김재민(金齊閔)이 김천일(金千鎰), 고경명(高敬命) 등과 함께 고부(古阜)에서 조직한 의병도 참여하였다. 웅치에서 조선군의 방어선을 뚫은 일본군은 전주(全州) 방면으로 진격하였으나, 전주 인근인 안덕원(安德院)에서 황진 장군이 이끄는 부대의 공격을 받고 퇴각하였다.

일본이 전주 인근에 이르자 조선은 경기전(慶基殿)에 보관 중인 태조 이성계의 어진(御眞)과 경기전 인근의 사고(史庫)에 보관 중인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보호에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고, 이를 담당할 사람으로 태인(泰仁)[현재의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태인면] 유생 안의(安義)손홍록(孫弘祿)이 추천되었다. 당시 안의손홍록을 추천한 사람은 경기전참봉으로 있었던 오희길(吳希吉)이었다. 이후 안의손홍록은 가동(家僮) 수십 명을 거느리고 경기전으로 들어가 태조 어진과 『조선왕조실록』을 꺼내어 어진은 1592년 6월 22일 내장산(內藏山) 용굴암(龍窟庵)으로, 『조선왕조실록』은 1592년 7월 1일 내장산 은봉암(隱峯庵)으로 옮겨 안전하게 보관하였다. 이후 태조 어진과 『조선왕조실록』은 모두 비래암(飛來庵)으로 옮겨졌고, 1593년(선조 26)에는 왕명에 따라 충청도 아산(牙山)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정유재란 때에는 강화(江華)로 피난하였다가, 다시 영변(寧邊)의 묘향산(妙香山) 보현사(普賢寺)에 안치되었다.

한편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우키타 히데히에[宇喜多秀家]가 이끄는 일본군이 현재의 정읍시 지역에 칩입하였다. 이에 일본군을 무찌르기 위한 의병의 항전이 있었다. 의병 항전의 대표적인 예는 1597년 9월 15일과 16일에 있었던 사현(沙峴)에서의 전투이다. 시현 전투에서 이허량(李許樑)과 이환(李丸)이 큰 공을 세우고 전사하였다.

[의의와 평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출신인 안의손홍록의 노력으로 태조 어진과 『조선왕조실록』이 안전하게 보존될 수 있었다. 만약 안의와 손흥록의 희생과 노력이 없었다면, 오늘날 『조선왕조실록』의 실물은 볼 수가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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