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묘호란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300432
한자 丁卯胡亂
영어공식명칭 Later Jin invasion of Joseon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송만오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627년 1월 8일 - 정묘호란 발발
종결 시기/일시 1627년 3월 3일 - 정묘호란 종결
발생|시작 장소 압록강 - 평안북도
종결 장소 강화도 - 인천광역시 강화군
관련 인물/단체 인조|강홍립|모문룡|소현세자|정봉수|이립|장만

[정의]

1627년 후금이 정읍 지역을 비롯한 조선을 침입하여 벌인 전쟁.

[개설]

후금(後金)의 군사가 압록강을 넘어 조선을 침입하여 오자, 인조(仁祖)와 대신들은 적군의 침입 배경과 전황을 점검하고, 전시 체제에 따른 각종 조치들을 의논하였다. 하지만 조선은 후금의 군사들에게 파죽지세로 밀렸고, 인조는 결국 강화도로 피란을 떠났다. 후금은 조선과 형제의 맹약을 맺은 뒤, 조선을 침략한 지 2달 후인 1627년 3월 초에 물러났다.

[역사적 배경]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옹립한 서인 정권은 광해군 때 취하였던 양면 정책을 버리고 뚜렷한 친명배금(親明排金) 정책을 취하였다. 이러한 조선의 외교 정책의 변화는 명을 공격하기에 힘쓰고 있던 후금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특히 명나라의 장수 모문룡(毛文龍)이 평안도 철산(鐵山) 가도(椵島)에서 조선과 손을 잡고 요동(遼東) 지방의 수복을 꾀하고 있었던 일은 후금에게 커다란 위협이 되었다. 이에 즉위 전부터 조선과의 화친(和親)을 반대하고 무력으로 조선을 칠 것을 주장하였던 후금의 태종은 왕위에 오르자 조선 공격을 결심하였다. 때마침 조선에서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고, 반란군의 잔여 무리가 후금으로 도망가 조선 안의 사정을 전하며 광해군의 폐위가 부당하다고 주장하자, 후금은 이를 구실 삼아 조선을 침공하였다.

[경과]

1627년 1월 8일, 3만 명에 이르는 후금의 군대가 선왕(先王)인 광해군을 위하여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을 걸고 사르후 전투에서 항복한 강홍립(姜弘立) 등 조선인을 길잡이로 삼아 조선을 침공하였다. 후금 군대는 압록강을 건너 1627년 1월 14일에는 의주성(義州城)을, 1627년 1월 15일에는 정주성(定州城)을, 1627년 1월 21일에는 안주성(安州城)을 점령하였다. 안주성에서 안주목사 김준(金浚)이 절제사(節制使) 남이흥(男以興)과 함께 싸우다 전사하였다. 김준의 아들 김유성(金有聲)도 사망하였으며, 이어 첩 김씨(金氏)와 딸도 죽었다.

김준은 고부군(古阜郡) 금정리(金井里)[현재의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농소동]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언양(彦陽)이다. 정묘호란 때 사망한 김준에게는 좌찬성을 아들 김유성에게도 벼슬을 내렸다. 김준은 정읍시 흑암신흥길 67-2[흑암동 597]에 있는 정충사에 배향되었다. 같이 사망한 첩과 딸에겐 정문이 내려졌다. 김준 등 가족들의 충신, 열녀, 효자로서 행적을 기리기 위하여 현재 정읍시 용계동 272-1언양김씨삼강정려(彦陽金氏三綱旌閭)가 세워져 있다. 언양김씨삼강정려는 2000년 11월 17일 전북특별자치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되었다.

안주성 전투 이후 후금 군대는 음력 1627년 1월 23일 평양성에 도착하였다. 전쟁이 시작된 지 불과 보름 만에 황해도와 평안도 전역이 후금의 군대에 장악된 것이다. 조선 측에서는 도원수(都元帥) 장만(張晩)이 이끄는 군대가 평양 등지에서 맞서 싸웠으나, 결국은 후금군에게 패하면서 본진이 개성까지 후퇴하고 말았다. 사태가 심각하자 조정에서는 소현세자(昭顯世子)를 전라도 전주로 피난시키고, 왕과 조정 대신은 강화도(江華島)로 피하게 되었다. 이후 조정 안에서 화친이냐 전쟁이냐의 양쪽 의견이 분분하던 차에, 배후의 위협을 느낀 후금이 강화의 의사를 밝히자 조선 정부도 이에 응하였다. 이에 따라 조선이 후금과 형제의 맹약을 맺는 대신 후금의 군대는 철수하고 양국 사이의 경계를 압록강으로 하기로 하는 등의 화약이 성립되었다.

[결과]

후금과의 화약으로 조선은 커다란 부담 없이 전쟁을 끝맺을 수 있었으며, 후금과의 강화 이후에도 명과의 관계를 지속할 수 있었다. 그러나 후금은 군대를 완전히 압록강 이북으로 철수시키지 않은 채 의주에 주둔시켜 모문룡의 명나라 군대를 견제하는 한편 국경 무역으로 많은 경제적 이득을 누릴 수 있었다. 또한 조선과 명이 외교 관계를 지속하는 것은 후금과 조선 사이의 분쟁 요소로 남게 되었다.

[의의와 평가]

후금은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조선과 화약을 맺었으나, 화약의 내용은 후금 입장에선 충분히 만족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 심지어 당시 화약을 주도하던 유해(劉海)는 후에 이중 첩자 혐의로 처형당하였다. 정묘호란 당시 후금이 품었던 불만은 훗날 병자호란이 터지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후금은 화약을 통하여 조선과의 교역을 열어 부족한 물자를 확보하고, 압록강 이남에 군대를 주둔시켜 모문룡의 명나라 군대와 조선의 준동을 사전 차단함으로써 내몽골 지역 등 근처 유목 부족들을 규합하여 세를 불릴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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