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3004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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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戊申亂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송만오 |
[정의]
1728년 이인좌 등의 소론이 영조와 노론 정권에 반대하며 일으킨 반란에 전라도 태인현감 박필현이 동조한 사건.
[개설]
무신란은 1728년(영조 4) 3월, 영조(英祖)의 폐위와 밀풍군(密豊君) 이탄(李坦)의 추대를 주장하면서 소론(少論) 준론(峻論)과 남인(南人) 사족(士族)이 연합하여 일으킨 사건이다. 전라도에서는 태인현감 박필현(朴弼顯)이 무신란에 동조하여 군사를 이끌고 전주성에 진격하였다.
[역사적 배경]
숙종(肅宗) 연간에 이르러 붕당 간 경쟁이 심화되었는데, 특히 숙종 말년에 후계 문제를 둘러싸고 노론과 소론의 갈등이 극에 달하었다. 갈등 속에 즉위한 경종(景宗)이 후사를 두지 못하자, 노론이 연잉군(延礽君)의 세제 책봉과 대리청정(代理聽政)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이에 반대하는 소론의 반격으로 신임옥사(辛壬獄事)가 일어났고, 노론은 큰 피해를 입었다. 그후 경종의 갑작스런 죽음과 노론의 집권으로 소론은 정치적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리고 영조가 왕위를 계승하고 ‘신임의리(辛壬義理)’를 내세우면서 노론은 정치력을 회복하였다. 이에 소론 준론이 소외되어 있던 남인 세력을 포섭하여 ‘경종 독살설’을 명분으로 영조의 폐위와 밀풍군의 왕위 추대를 내세우면서 반란을 일으켰다.
[경과]
1728년 3월 15일 이인좌(李麟佐)가 청주에서 거병하자, 이에 호응하여 3월 20일에 영남의 안의(安義)와 거창, 호남의 태인에서도 거병하였다. 당시 호남의 군대는 태인현감 박필현이 이끌기로 하였다. 박필현은 1726년에 이인좌가 경상도 상주로 이주하였을 때 서로 만나 사생지교(死生之交)를 맺고 반란의 뜻을 품었다. 그리고 묵동(墨洞)에 있는 서제(庶弟) 박만호(朴萬戶)의 집에서 평안병사(平安兵使) 이사성(李思晟) 및 호남의 한세홍(韓世弘)과 자주 모여 구체적인 거사 계획을 짰다. 이후 태인(泰仁)의 현감으로 부임하게 되자 무장(茂長)에 유배되어 있던 종형 박필몽(朴弼夢)과 함께 군대를 일으키려고 하였다. 그러다가 이인좌가 난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군사를 이끌고 전주로 행하였다. 그러나 서로 힘을 같이 하기로 한 부안의 사족과 박필몽의 불참 등으로 큰 힘을 갖지 못하였다. 더욱이 전주성에 이르렀을 때 동조하기로 한 전라감사 정사효(鄭思孝)의 배신으로 박필현의 반란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결과]
반역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접한 영조는 오명항(吳命恒)을 도순무사(都巡撫使)로 파견하였으나, 반군의 기세에 놀려 제대로 진압하지 못하였다. 이에 오군영 소속 정예 병력을 투입하여 마침내 반란군의 세력을 누그러뜨릴 수 있었다. 이후 무신란에 가담한 자들에 대한 처벌이 이루어졌다. 주동 세력인 김일경, 목호룡, 이인좌, 이웅보(李熊輔), 이사성(李思晟), 정희량(鄭希亮), 남태징(南泰徵), 민관효 등이 역적으로 몰려 처형되었다. 박필현 또한 화를 피할 수 없었다. 박필현은 경상도까지 달아났다가 붙잡혔는데, “한양으로 보내 국문을 받게 해 달라”라고 애걸하였으나 참수당하였다. 박필현의 종형인 박필몽도 체포되어 국문을 받고 처형당하였다. 전라감사로 있으면서 박필현에게 성문을 열어 주지 않았던 정사효는 내응한 것이 문제가 되어 1730년(영조 6)에 국문을 받던 도중 죽었다. 이후 역적으로 간주되었다가 1908년(융희 2)에 복권되었다. 무신란으로 인하여 전라도의 이름이 전광도(全光道)로 변경되었고, 나주·남원·장흥·담양 등은 강등되었다가 10년 후인 1738년(영조 14)에야 복구되었다.
[의의와 평가]
무신란 이후로 영조는 탕평책(蕩平策)의 추진 명분을 확고하게 하면서 왕권 강화와 정국 안정을 도모할 수 있게 되었다. 최근 무신란 ‘반란군’의 지역·출신 등에 관한 연구에서는 노론 정권 아래서 소외된 사족이 주도하고 하급 군관, 중인, 양인, 노비 등은 소수에 불과하였기 때문에 무신란의 민중 운동적 성격에 대한 재고가 필요하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