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300451
한자 井邑發言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재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46년 6월 3일연표보기 - 이승만 정읍발언
발생|시작 장소 정읍동초등학교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충정로 176[장명동 29]지도보기

[정의]

1946년 6월 3일 정읍에서 있었던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위한 이승만 대통령의 발언.

[개설]

1946년 6월 3일 이승만은 정읍에서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을 공식적으로 언급하였고, 이러한 발언을 가리켜 ‘이승만의 정읍발언’이라 한다.

[역사적 배경]

좌익 중심의 찬탁운동과 우익 중심의 반탁운동의 대결이 극심하게 되자 이승만은 1946년 6월 3일, 전국 각지를 순회하는 도중 정읍동초등학교[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충정로 176[장명동 29]]에서 “이제 우리는 무기 휴회된 미소공동위원회가 재개될 기색도 보이지 않으며, 통일 정부를 고대하나 여의케 되지 않으니, 우리는 남방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38 이북에서 소련을 철퇴하도록 세계 공론에 호소하여야 될 것이다”라는 정치적 발언을 하였다.

[경과]

이승만은 발언 이후, 남한 단독 정부 수립에 본격적으로 나섰고, 1946년 12월부터 1947년 4월까지 미국에 건너가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촉구하는 외교 활동을 벌이고 돌아왔다. 이승만은 발언한 날인 1946년 6월 3일 정읍에서 가장 오래된 숙박 시설인 한일여관에서 하룻밤을 묵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제는 이러한 중대한 발언을 서울도 아닌 ‘왜 정읍에서 하였느냐’이다. 순회 도중 우발적으로 하였다고 볼 수 있으나 반면에 사전에 치밀하게 기획된 발언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왜 정읍인가에 대하여서는 아직까지 의견이 분분하고, 정확한 의도를 규명하지 못하고 있다.

이승만의 정읍발언 이후인 1948년 2월 10일 김구는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이란 글에서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 38도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에 구차한 안일을 위하여 단독 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라고 말하였다.

[결과]

이승만의 이 같은 발언은 미군정을 종식시킨다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으나, 통일정부가 아닌 남한만의 정부 수립이라는 부정적인 측면이 있었다. 하지만 이승만은 미국에 편승하여 남한에 단독 정부를 세우고, 이를 토대로 북한을 통일[북진통일]하려는 2단계 전략의 일환이었을 것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 일부에서는 정읍발언이 분단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 “좌우 합작 노력이 수반되던 중 38선 이남에 단독 정부를 수립하여야 된다는 주장을 이승만이 처음으로 공론화하였다”라며, 정읍발언으로 “이승만은 분단 책임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라고 주장한다. 이에 반하여 1946년 2월 이미 북한 지역에 정부에 해당하는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가 성립되었기 때문에 정읍발언은 분단과 무관하다고 보기도 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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