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300516
한자 考巖書院廟庭碑
영어공식명칭 Goam Seowon Myojeongbi
분야 종교/유교
유형 유적/비
지역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모촌길 48-17[하모동 378]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박노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관련 인물 생년 시기/일시 1607년 - 송시열 출생
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1689년 - 송시열 사망
건립 시기/일시 1747년연표보기 - 고암서원묘정비 건립
문화재 지정 일시 1984년 4월 1일연표보기 - 고암서원묘정비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81호 지정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21년 11월 19일 - 고암서원묘정비 전라북도 문화재자료로 변경 지정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24년 1월 18일 - 고암서원묘정비 전북특별자치도 문화재자료로 변경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24년 5월 17일 - 고암서원묘정비 전북특별자치도 문화유산자료로 변경
현 소재지 고암서원묘정비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모촌길 48-17[하모동 378] 고암서원지도보기
성격 비석
관련 인물 송시열
재질 화강암
크기(높이, 너비, 두께) 195㎝[높이]|78㎝[폭]|19㎝[두께]
소유자 고암서원
관리자 고암서원
문화재 지정 번호 전북특별자치도 문화유산자료

[정의]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하모동에 있는 고암서원을 건립하고 세운 조선 후기 비석.

[개설]

고암서원묘정비(考巖書院廟庭碑)는 1747년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1607~1689]을 향사하기 위하여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하모동 모촌마을에 고암서원을 건립하고 세운 묘정비이다. 묘정비는 이재(李縡)가 글을 짓고, 민우수(閔遇洙)가 글씨를 쓰고, 유척기(俞拓基)가 전면 서를 썼다. 1984년 4월 1일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81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보호법시행령」 고시에 따라 지정 번호가 삭제되어 전라북도 문화재자료로 변경되었다. 2024년 1월 18일 전북특별자치도 문화재자료로 명칭이 변경되었고, 2024년 5월 17일 국가유산청의 「국가유산기본법」 시행에 따라 전북특별자치도 문화유산자료로 변경되었다.

[건립 경위]

고암서원은 1689년(숙종 15) 송시열이 제주도에서 나문(拿問)[죄인을 잡아다가 그의 죄에 대하여 캐어물음]하라는 명을 받고 서울로 올라가다가 정읍현에 도착한 후 사약을 받게 되었다. 숙종이 나중에 크게 뉘우치고 송시열의 관작을 회복시키고 ‘문정(文正)’이란 시호를 하사하였다. 이후 정읍현에서는 고암서원을 세우고 송시열을 향사하였다. 고암서원묘정비정읍현의 유림들의 발의로 세우게 되었다.

[위치]

고암서원묘정비는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모촌길 48-17[하모동 378] 고암서원 안에 있다.

[형태]

고암서원묘정비는 바닥면에서 1단을 올려 기단을 조성하고, 화강암의 주춧돌을 놓은 후 기둥을 올렸다. 정면 1칸, 측면 1칸, 겹처마 맞배지붕의 보호각 안에 비석이 있다. 비석은 화강암 기단 위에 비신을 올리고 이수를 얹었다. 비신은 높이 195㎝, 폭 78㎝, 두께 19㎝이다.

[금석문]

고암서원묘정비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숙종 기사년[1689년(숙종 15)]에 우암(尤菴) 송선생(宋先生)이 제주에서 나문하라는 명을 받고서 서울로 올라가다가, 이 현(縣)[정읍현]에 도착한 후 명을 받았다. 50여 년이 지난 지금 학사(學士)나 대부(大夫)로서 이곳을 지나는 자 탄식하며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었으며, 차마 발길을 돌리지 못하였다. 아. 이것이 누가 시켜서 그런 것이겠는가? 대저 하늘이 대현(大賢)을 내신 것은 오도(吾道)를 위하여서이고, 생민(生民)을 위하여서이다. 선생께서 효종을 보필할 때 몸소 천하의 대의를 수립할 것을 자임하셨는데, 중도에 효종이 승하하시어 일을 성사시킬 수가 없었은 즉, 마침내 계획을 거두어들이고 가슴속에 담아 두셨다. 그러면서도 간절하게 세상을 구제하려는 뜻을 잊지 못하여 천리(天理)를 밝히고 인심(人心)을 바로잡는 것으로 자신의 소임을 삼으셨다. 선성(先聖)의 도(道)를 수호하고 이단의 학설을 물리쳤으니, 실로 맹자(孟子)와 주자(朱子) 이후의 한 분이셨다. 이런 의리를 견지하였기에 비록 커다란 화가 목전에 닥친 것을 환히 알면서도 일신의 안위를 돌아보지 않으셨는데, 흉악한 무리들이 번갈아 선동함에 삼공(三公)의 권위가 위태해지더니 선생이 맨 먼저 화를 입게 된 것이다. 문곡(文谷)[김수항(金壽恒)의 호]의 묘지명을 짓는 것을 마지막으로 선생은 절필하셨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죽음이 영예로울 때가 있다’ 하였으니 자못 선생 자신을 두고 말한 것이라 하겠다. 선생은 비록 한때에 화를 입었지만 천지와 같은 의리는 끝내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와 반대로 말하는 자는 삿된 무리가 아니면 역적이다. 우리나라 동방의 한 강토가 군신과 부자의 윤리를 알고 오랑캐나 금수로 떨어짐을 면한 것은 모두가 선생 덕분이다. 아. 선생의 덕이 성대하도다. 선생의 휘는 시열(時烈)이고, 자는 영보(英甫)이며, 은진(恩津) 사람이다. 만력(萬曆) 정미년[1607년(선조 40)]에 출생하셨다. 효종이 막 즉위하시어 선생께 예를 다하여 초빙하였으며, 관직이 좌의정일 때에 치사(致仕)하였다. 돌아가신 지 6년이 지난 다음 성상[숙종]이 크게 뉘우치고 대위(臺位)와 권위가 서고 바로잡히게 되었다. 이에 선생의 관작(官爵)을 회복시키고 나라에서 제사를 지내주고 또 문정(文正)이라는 시호를 추증하였다. 선생의 유택(遺澤)이 함께 미쳐 사당을 지어 향사를 지내게 되었으니 고암서원이 바로 그 하나이다. 장보(章甫)[유학을 공부하는 선비]가 발의하여 묘정(廟庭)에 비석을 세우기로 하고, 이재에게 비문을 써 주기를 부탁하여, 그 본말과 지업(志業)을 대략 이와 같이 서술한다.”

[현황]

현재 고암서원묘정비의 뒷면 두전이 써진 중앙 부분은 풍우로 인하여 석질이 많이 훼손된 상태이다.

[의의와 평가]

고암서원묘정비송시열에 대한 정읍 사람들의 생각을 알 수 있는 비석으로 지역사 연구의 중요 자료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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