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3005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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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忠臣 詩山許公 尙徵之閭 |
이칭/별칭 | 허상징 정려 |
분야 | 종교/유교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북면 장학리 564-1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노석 |
건립 시기/일시 | 185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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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소재지 | 충신 시산허공 상징지려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북면 장학리 5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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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정려각 |
양식 | 팔작지붕 |
정면 칸수 | 1칸 |
측면 칸수 | 1칸 |
소유자 | 태인 허씨 문중 |
관리자 | 태인 허씨 문중 |
[정의]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북면 장학리에 있는 허상징의 충효를 기리는 조선 후기 정려.
[개설]
허상징[?~1597]은 본관이 태인(泰仁), 자는 우옥(宇玉), 호는 도암(道庵)이다. 시산군(詩山君) 허사문(許士文)의 후손이며, 아버지는 허무정(許武定)이다. 현재의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북면 장학리 장재동에서 출생하였다. 총명하고 비범하여 중봉(重峯) 조헌(趙憲)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도의를 강마하고, 병서를 익히니 조헌이 크게 칭찬하여 당호(堂號)를 ‘도암’이라 하였다. 친상(親喪)에 시묘살이를 하였는데, 삭망(朔望)[초하루와 보름]에는 호랑이가 사슴을 잡아와서 포를 만들었으며, 새가 과일을 물어 왔다고 한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군량과 포목을 거두어서 장성 남문의병청(南門義兵廳)에 보내고, 가동(家僮)과 의사 정복남(鄭卜男) 등 10여 명을 거느리고 들어가 김제민(金齊閔)의 선봉이 되어 직산(稷山)과 진위(振威)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정유재란 때인 1597년(선조 30) 9월 명나라의 부총병 해생(解生)·양등산(揚登山) 등이 직산(稷山) 북방 소사평(素沙坪) 홍경원(弘慶院)에서 일본군 장군 구로다[黑田長政]의 군사와 싸워 큰 전고를 올렸다. 이때 허상징도 참전하였으나 일부 전투에서 중과부적으로 전사하였다. 3년 후 아내의 꿈에 허상징이 나타나 “나의 시체가 어느 곳에 있다”라고 하자, 열 살 된 어린 아들과 가서 파 보니 과연 시체가 있었다고 한다. 장성 오성사(鰲山祠)에 배향되었고, 1851년(철종 2) 명정을 내려 충신 시산허공 상징지려(忠臣 詩山許公 尙徵之閭)를 세웠다. ‘허상징 정려’라고도 한다.
[위치]
충신 시산허공 상징지려는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북면 장학리 564-1번지에 있다. 장학리 장재마을 마을회관에서 원불교 교당 쪽 길 오른쪽에 있다.
[형태]
충신 시산허공 상징지려는 붉은 벽돌을 쌓아 담장을 둘렀으며, 담장 안에 보호각이 있다. 정려각은 1단의 화강석 기단 위에 종형 주춧돌을 놓고, 민흘림기둥을 세웠다. 정면 1칸, 측면 1칸의 홑처마 팔작지붕 기와집이다. 정판, 정려기, 중수기 등의 편액이 있다. 편액에는 ‘충신시산허공상징지려 동치이년 계해 사월 일(忠臣詩山許公尙徵之閭 同治二年 癸亥 四月 日)’이라 쓰여 있다.
[의의와 평가]
충신 시산허공 상징지려는 허상징의 충효와 효행을 알 수 있는 유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