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300545
한자 學生 金芳洙 妻 烈女 靈光 丁氏 旌閭
이칭/별칭 열녀 김방수 처 영광 정씨 지려
분야 종교/유교
유형 유적/건물
지역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영원면 은선리 274-8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박노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812년연표보기 - 학생 김방수 처 열녀 영광 정씨 정려 건립
개축|증축 시기/일시 1829년 - 학생 김방수 처 열녀 영광 정씨 정려 중수[1829]
개축|증축 시기/일시 1900년 - 학생 김방수 처 열녀 영광 정씨 정려 중수[1900]
현 소재지 학생 김방수 처 열녀 영광 정씨 정려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영원면 은선리 274-8 지도보기
성격 정려각
양식 팔작지붕
정면 칸수 1칸
측면 칸수 1칸
소유자 부안 김씨 문중
관리자 부안 김씨 문중

[정의]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영원면 은선리에 있는 김방수의 부인 영광 정씨의 열행를 기리기 위하여 세운 조선 후기 정려.

[개설]

김방수(金芳洙)의 아내 영광 정씨는 본관이 영광이고, 아버지는 정해관(丁海觀), 어머니는 오씨이다. 정씨는 결혼하기 전 6~7세인 남동생이 병에 걸려 살아남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고, 매일 밤 하늘에 빌면서 자신이 남동생을 대신하여 죽기를 원하였다. 가문의 대가 끊어지는 것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처럼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바른 행실로 부모 섬기기를 게을리하지 않아서 인근에 효녀로 소문이 났다.

23세에 부령인(扶寧人) 김방수와 혼인하였다. 미처 신행(新行)을 가지 못하였는데, 남편이 중병에 걸려 위중하다는 소식을 듣고 하늘에 쾌유를 빌며 온갖 정성을 다하였지만 회생하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정씨는 이 소식을 듣고 기절하여 쓰러졌다. 스스로 죽고자 하니, 아버지가 꾸짖어 말하기를 “배 속에 아이가 있어 다행이다. 아이를 낳으면 남편의 후사가 끊어지지 않으니 네 몸을 마음대로 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정씨가 아버지의 말을 듣고 남편의 상(喪)을 치르기 위하여 이틀 길을 달려가면서 한 알의 곡식도 입에 넣지 않고 시집에 당도하여 남편의 시신을 거두었다. 몸에 맨 허리띠와 얼굴 가림을 풀고 말하기를 “혼인한 지 2년 동안 지아비의 얼굴도 익숙하지 못한데, 이제 지하에서나마 얼굴을 익히기를 바란다”라며 크게 소리치고 울면서 많은 피를 토하며 기절하였다. 시어머니가 타일러 “네 남편의 핏줄이 네 배 속에 있으니 어찌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시어머니가 거처를 같이 하면서 가까이에서 보살피는데, 어느 날 시어머니가 잠든 것을 기다렸다가 문을 열고 나가서 처마 끝에 목을 매어 죽으려 하니, 잠을 깬 시어머니가 놀라서 구하였다. 며칠이 지나 정씨가 시어머니에게 말씀드리기를 “한 넋이 떨어져 삼종지도가 끊어졌으니 살아서 자식을 낳은들 무엇하리오” 하고 남편의 장사 지내는 날에 같이 묻히기를 원하였다. 시누이에게는 시어머니를 잘 봉양하도록 부탁하고 자신이 끝까지 봉양하지 못함을 불효하다 하고 남몰래 들어가 남편의 관에 의지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으니 같은 날에 함께 장사지냈다.

고을 선비들이 일제히 의논하여 말하기를 “이는 참으로 열부(烈婦)이다”라고 하고, 군(郡)과 감영에 알리고, 조정에 알려 마을에 정문(旌門)을 세웠다. 두 살 된 형의 아들을 양자로 들여 후사를 잇게 하였다. 김방수의 본관은 부령(扶寧)[현 부안]이다. 김방수는 군사공(郡事公) 김광서(金光叙), 승지공(承旨公) 김직손(金直孫), 매당공 김정구(金正龜)의 후손이다.

[위치]

학생 김방수 처 열녀 영광 정씨 정려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영원면 은선리 274-8번지에 있다.

[변천]

학생 김방수 처 열녀 영광 정씨 정려는 1812년(순조 12) 3월 14일 명정(命旌)이 내려졌으며, 1829년(순조 29) 중수하였다. 1990년 다시 중수하였으며, 2002년 3월 군사공파(郡事公派) 내 승지공파(承旨公派)의 매당 종중에서 정려 앞에 비석을 건립하였다.

[형태]

학생 김방수 처 열녀 영광 정씨 정려는 흙과 돌을 이용하여 쌓고, 위에 기와를 얹은 담장으로 둘러져 있다. 중앙에는 출입문이 있다. 출입문 위에 ‘열녀 김방수 처 영광 정씨지려(烈女 金芳洙 妻 靈光 丁氏之閭)’라고 쓰인 현판이 있다. 안으로 들어가면 바닥은 시멘트로 정리하고, 화강암 기둥 위에 목재 기둥을 올렸다. 정려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 겹처마 팔작지붕이다. 정려각 안에 비석이 있다. 비석의 정면에는 ‘학생 김방수 처 열녀 영광 정씨지려 상지즉위 십이년 임신삼월십사일 명정(學生 金芳洙 妻 烈女 靈光 鄭氏之閭 上之卽位 十二年 壬申三月十四日 命旌)’이라 쓰여 있다. 비석 위에도 같은 내용의 현판이 걸려 있다. 정려각 안에는 연안 이씨(延安 李氏) 이도중(李度中)이 쓴 「열녀정씨정문음기(烈女丁氏旌門陰記)」, 1829년 연안 이씨 전 감역(監役) 이효명(李孝明)이 쓴 「열녀정씨정려중수기(烈女丁氏旌閭重修記)」, 1900년(고종 37) 충주 박씨(忠州 朴氏) 박만휴(朴滿休)가 쓴 「열녀정씨정려중수기(烈女丁氏旌閭重修記)」가 있다. 오랜 세월이 지나 정려각이 퇴락하자 후손 김형배(金炯培)가 정려를 현재의 자리로 확장 이건하여 원래의 위치는 알 수 없다. 정려 앞에는 이도중이 쓴 「열녀정씨정문음기」를 번역하여 세운 비석이 있다.

[현황]

학생 김방수 처 열녀 영광 정씨 정려는 2023년 현재 관리가 잘 이루어지고 있다.

[의의와 평가]

학생 김방수 처 열녀 영광 정씨 정려는 정씨 부인의 열행을 살필 수 있는 유적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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