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3005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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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礪山 宋氏 孝烈閭 |
이칭/별칭 | 송경화 처 동래 정씨정,송종도 정려 |
분야 | 종교/유교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감곡면 오주리 503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노석 |
건립 시기/일시 | 182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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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립 시기/일시 | 1839년![]() |
현 소재지 | 여산 송씨 효열려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감곡면 오주리 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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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정려 |
양식 | 팔작지붕 |
정면 칸수 | 1칸 |
측면 칸수 | 1칸 |
소유자 | 여산 송씨 문중 |
관리자 | 여산 송씨 문중 |
[정의]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감곡면 오주리에 있는 여산 송씨 가문의 효열 정려.
[개설]
여산 송씨 효열려(礪山 宋氏 孝烈閭)는 여산 송씨 송경화(宋慶化)의 아내 동래 정씨와 송경화의 아들 송종도(宋宗道)의 효행을 기리기 위하여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감곡면 오주리 양오마을에 세운 정려이다. 남편 송경화가 병에 걸리자 동래 정씨는 상분험병(嘗糞驗病)[환자의 변을 맛보아 가며 병의 증세를 판단함]하고, 손가락을 찢어 피를 주혈시켜 9일 동안 연명하였으나 결국 송경화는 사망하였다. 이후 동래 정씨는 여러 차례 음독 자살을 기도하였으나 가족들에게 발각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자녀 교육에 심혈을 기울여 타의 귀감이 되었다. 1825년 10월 명정되었다. 아들 송종도 역시 어버이의 병환에 혈지상분(血指嘗糞)[손가락을 째 피를 주혈하고, 환자의 변을 맛보아 증세를 살핌]하였다. 1839년(헌종 5) 명정되었다.
[위치]
여산 송씨 효열려는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감곡면 오주리 503번지에 있다.
[변천]
1826년 동래 정씨를 기리는 정려가 건립되었고, 1839년 송종도를 기리는 정려가 건립되었다.
[형태]
여산 송씨 효열려는 담장 안에 두개의 정려가 있다. 오른쪽에 있는 정려는 화강암 기둥을 창방 바로 아래까지 올렸다. 정면 1칸, 측면 1칸, 겹처마 팔작지붕이다. 중앙에 비석이 있다. 고개를 오른쪽으로 살짝 돌린 거북 위에 비석을 세웠다. 뚜껑돌은 없다. 비석의 정면에는 ‘유명조선 효자 학생 여산 송종도지려(有明朝鮮 孝子 學生 礪山 宋宗道之閭)’라고 쓰여 있다. 비석은 높이 112㎝, 폭 40㎝, 두께 18㎝이며 1839년 건립되었다. 비문은 1839년 4월 반남후인(潘南後人) 전행이조판서 규장각직제학(前行吏曹判書 奎章閣直提學) 박기수(朴綺壽)[1774~1845]가 글을 짓고,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1770~1847]이 글씨를 썼다.
왼쪽에 있는 정려는 화강암 기초 위에 기둥을 올렸다. 정면 1칸, 측면 1칸,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도리에 ‘효열문(孝烈門)’이라 쓰여 있다. 중앙에 비석이 있고, 정면을 보고 있는 거북 위에 비신을 올렸다. 뚜껑돌은 없다. 비석의 정면에 ‘유명조선 열녀 학생 송경화 처 동래 정씨지려(有明朝鮮 烈女 學生 宋慶化 妻 東來 鄭氏之閭)’라고 쓰여 있다. 비석의 높이는 118㎝, 폭 44㎝m, 두께 20㎝이다. 비문은 1826년 2월 통정대부 승정원좌승지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수찬관(通政大夫 承政院左副承旨 兼 經筵參贊官 春秋館修撰官) 구강(具康)[1757~1832]이 글을 짓고, 이삼만이 글씨를 썼다. 비석 위에는 ‘유명조선 열녀 학생 송경화 처 동래 정씨지려 금상이십육년을유십월 일 명정(有明朝鮮烈女學生宋慶化妻東來鄭氏之閭 今上二十六年乙酉十月 日 命旌)’이라 쓰인 현판이 있으며, 현편의 뒤에는 구강의 기문이 있다.
[현황]
여산 송씨 효열려는 정려각 주변으로 넓은 뜰이 있고 뜰을 둘러싸고 담장이 둘러져 있다. 2023년 4월 조사 시에는 담장이 오래되어 허물어져 있고 정려각을 둘러싼 마당은 수풀이 우거져 있었다. 하지만 정려각 안의 비는 잘 보존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여산 송씨 효열려는 여산 송씨 가문의 열행과 효행을 살필 수 있으며, 정읍 출신의 조선 후기 서예가 이삼만의 글씨를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