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300558
한자 義城 金氏 孝烈旌閭
분야 종교/유교
유형 유적/건물
지역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칠보면 백암리 594-1
시대 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
집필자 박노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관련 사항 시기/일시 1841년연표보기 - 김광철 처 전주 이씨 열녀 명정
관련 사항 시기/일시 1858년연표보기 - 김종순 처 강진 김씨 열녀 명정
관련 사항 시기/일시 1870년연표보기 - 김종순 효자 명정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00년연표보기 - 김동혁 효자 명정
현 소재지 의성 김씨 효열정려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칠보면 백암리 594-1 지도보기
원소재지 의성 김씨 효열정려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칠보면 반곡리 지도보기
성격 정려각
양식 팔작지붕
정면 칸수 1칸
측면 칸수 1칸
소유자 의성 김씨 문중
관리자 의성 김씨 문중

[정의]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칠보면 백암리에 있는 의성 김씨 가문의 효열을 기리는 조선 후기 및 개항기 정려.

[개설]

의성 김씨 효열정려(義城 金氏 孝烈旌閭)의성 김씨 김광철(金光喆)의 아내 전주 이씨, 효자 김종순(金鍾淳), 김종순 아내 강진 김씨, 효자 김동혁(金東赫)[1861~1886], 김세윤(金世潤) 아내 열녀 여주 이씨의 효열을 기리기 위하여 설립하였다.

전주 이씨는 결혼하기 전 부모가 병환으로 위중하게 되자, 손가락을 찢어 피를 주혈시켜 회생하게 하였다. 이러한 사실이 조정에 알려지자 어린 나이임에도 특별히 복호(復戶)[세금과 부역을 면하게 함]를 내렸다. 출가하여 김광철의 병환에 허벅지살을 베어 먹여 수일간 연명하도록 하였다. 그럼에도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극진하게 장례를 치렀고. 1841년(헌종 6) 명정을 내렸다.

김광철의 아들 김종순의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문숙(文淑), 호는 만하(晩霞)이다.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칠보면 백암리에서 출생하였다. 효성이 지극하여 어머니의 병환에 손가락을 찢어 주혈(注血)하여 3일 동안 연명하도록 하였다. 할아버지의 병환에는 허벅지 살을 베어 다려 먹였고, 세상을 떠난 후에는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다. 철종 대 복호의 은전을 내렸으며, 1870년(고종 7) 효행으로 명정을 내렸다. 1875년(고종 12) 사헌부감찰로 추증하였다. 묘소는 정읍시 산내면 능교리 봉무동에 있다. 아내는 강진 김씨이다. 김종순이 손가락을 찢어 부모를 3일 동안 소생하게 하였으나, 다시 병세가 위중하게 되자 강진 김씨가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어 다려 먹이니 8일 동안 연명하였다. 이러한 사실이 알려져 1858년(철종 9) 명정을 내렸다.

김동혁의 본관은 의성, 초명은 세환(世煥), 자는 윤대(允大)이다. 오봉(鰲峰) 김제민(金齊閔)[1527~1599]의 후손이며, 아버지는 김병락(金炳洛)이다. 정읍시 칠보면 백암리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아버지의 병환에 대변을 맛보아 증세를 살피고 또 손가락을 잘라 병을 구안하였는데 다섯 손가락이 없어졌을 정도였다. 18세의 나이로 아버지보다 앞서 사망하였다. 도백(道伯)의 장계(狀啓)에 의하여 1900년(광무 4) 효행으로 정려를 내렸다.

[위치]

의성 김씨 효열정려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칠보면 백암리 594-1번지에 있다.

[변천]

의성 김씨 효열정려는 『전북의 정려·충효열비』에는 반곡리 반곡에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당시에는 정려각이 불타서 문 뒤에 달아 놓았다고 하였는데 이후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형태]

의성 김씨 효열정려는 정려각 3개가 있다. 대지 위에 1단을 올리고, 화강암의 기초석 위에 화강암 기둥을 반 정도 올리고, 위에 목재 기둥을 올렸다. 모두 정면 1칸, 측면 1칸, 겹처마, 팔작지붕이다. 맨 우측에 있는 정려각의 바깥 면에는 ‘효녀 증동몽교관 조봉대부 의성 김광철 처 영인 전주 이씨지려 상지육년경자 명정(孝女 贈童蒙敎官 朝奉大夫 義城 金光喆 妻 令人 全州 李氏之閭 上之六年庚子 命旌)’이라고 쓰인 현판이 있다. 정려각의 안에는 ‘효녀 증동몽교관 조봉대부 의성 김광철 처 영인 전주 이씨지려 상지십오년계해육월 일 손종순 근서(孝女 贈童蒙敎官 朝奉大夫 義城 金光喆 妻 令人 全州 李氏之閭 上之十五年癸亥六月 日 孫鍾淳 謹書)’라고 쓰인 현판이 있으며, 아래에는 ‘효녀 의성 김광철 처 유인 전주 이씨지려(孝女 義城 金光喆 妻 孺人 全州 李氏之閭)’라고 쓰인 비석이 있다.

중앙에 있는 정려각 중앙에는 ‘효부 증통훈대부 사헌부감찰 의성 김종순 처 숙인 강진 김씨지려 상지구년무오 명정(孝婦 贈通訓大夫 司憲府監察 義城 金鍾淳 妻 淑人 康津 金氏之閭 上之九年戊午 命旌)’이라 쓰인 현판이 있으며, 뒤쪽에는 ‘열녀 학생 의성 김세윤 처 유인 여주 이씨지려 상지칠년경인 명정(烈女 學生 義城 金世潤 妻 孺人 驪州 李氏之閭 上之七年庚寅 命旌)’이라 쓰인 현판이 있다. 아래에는 ‘효부 증통훈대부 사헌부감찰 의성 김종순 처 숙인 강진 김씨지려(孝婦 贈通訓大夫 司憲府監察 義城 金鍾淳 妻 淑人 康津 金氏之閭)’라고 쓰인 비석이 있는데, 1876년 가선대부 호조참판 겸 경연관 안동 김병준(金柄駿)[1815~?]이 비석의 글을 지었다.

좌측에 있는 정려각의 중앙에는 ‘효자 증통훈대부 사헌부감찰 의성 김종순지려 상지칠년경자 명정(孝子 贈通訓大夫 司憲府監察 義城 金鍾淳之閭 上之七年庚子 命旌)’이라 쓰인 현판이 있으며, 뒷면에는 ‘효자 학생 의성 김동혁지려 상지사십삼년병오십일월일 명정(孝子 學生 義城 金東赫之閭 上之四十三年丙午十一月日 命旌)’이라 쓰인 현판이 있다. 아래쪽에는 ‘효자 증통훈대부 사헌부감찰 의성 김종순지려(孝子 贈通訓大夫 司憲府監察 義城 金鍾淳之閭)’라 쓰인 비석이 있는데, 1870년 8월 아들 김정학(金正學)과 김기학(金璂學)이 비석을 세웠다. 비문은 1875년 5월 가선대부 사헌부대사헌 성균관좨주 겸 경연관 서하(西河) 임헌회(任憲晦)[1811~1876]가 글을 지었다.

[현황]

의성 김씨 효열정려의성 김씨 가문에서 잘 관리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의성 김씨 효열정려의성 김씨 가문의 효행을 알 수 있는 유적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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