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30056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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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海 金氏家 旌閭 |
이칭/별칭 | 김정희 정려,김기헌 처 울산 김씨 정려 |
분야 | 종교/유교 |
유형 | 유적/비 |
지역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산외면 산외로 939-26[화죽리 171]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박노석 |
관련 인물 생년 시기/일시 | 1797년 - 김정희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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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인물 생년 시기/일시 | 1830년 - 김기헌 처 울산 김씨 출생 |
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 1854년 - 김정희 사망 |
건립 시기/일시 | 1871년![]() |
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 1893년 - 김기헌 처 울산 김씨 사망 |
건립 시기/일시 | 1907년![]() |
보수|복원 시기/일시 | 2020년 - 김해 김씨가 정려 보수 정리 |
현 소재지 | 김해 김씨가 정려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산외면 산외로 939-26[화죽리 171]![]() |
성격 | 정려 |
양식 | 석정려 |
관련 인물 | 김정희|울산 김씨 |
소유자 | 김해 김씨 문중 |
관리자 | 김해 김씨 문중 |
[정의]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산외면 화죽리에 있는 김해 김씨 가문의 효열을 기리는 개항기 석정려.
[개설]
김해 김씨가 정려(金海 金氏家 旌閭)는 김해 김씨 김정희(金廷熙)[1797~1854]의 효행과 김기헌(金基憲)의 아내 울산 김씨의 열행을 기리기 위하여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산외면 화죽리 엄계마을에 세운 석정려이다. 김정희는 본관이 김해, 자는 치서, 호는 덕암, 다른 이름은 국희이다. 탁영 김일손의 12세손이다. 김일손의 아들이 남원에 유배 오게 되어 후손이 남원에 거주하게 되었다. 아버지는 남원에서 태인으로 이거한 김계학(金啓學)이다. 김정희는 어린 시절부터 총명하고, 영특하고 부모님을 공경하여 따르고, 장성하여서는 부모 섬기기를 큰 기쁨으로 여기며 정성을 다하여 부지런히 봉양하였다. 부모님이 병환으로 눕자 변을 받아 맛보며 처방하여 치료하고, 천체산에 올라 빠른 쾌유를 기원하였다. 온 정성을 다하여 보살폈으나 불행히 상을 당하자, 슬픈 와중에도 예로써 많은 조문객을 맞이하고 정성을 다하여 장례를 마쳤다. 이에 주변 사람들이 김정희의 효행을 칭찬하였다. 이후 1859년 호남 사림의 천거로 증 동몽교관 조봉대부, 증 통정대부 승정원좌승지 겸 경연참찬관에 증직되었다.
울산 김씨[1830~1893]의 아버지는 하서 김인후의 후손 김방태이다. 울산 김씨는 천성이 정숙하고 고요하여 시부모를 정성껏 봉양하였고, 어려운 살림살이에도 조상의 제사를 지낼 적에 법도에 어긋남이 없었다. 이에 호남 사림이 효부라 칭하였다. 도내 『삼강록』에는 남편의 목숨이 위중하자 손가락을 깨물어 입안에 피를 흘려 마시게 하니, 깨어나 하루 동안 의식을 되찾았으나 불행히 삼경에 이르러 어린 자식 7형제를 남겨 놓고 운명하였다고 한다. 울산 김씨는 혼자 자식들을 키우고 가르쳐 훌륭한 사람으로 성장시켰다고 되어 있다. 효열의 행적이 많고 뚜렷하므로 사림이 발의하여 1907년 명정되었다.
[위치]
김해 김씨가 정려는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산외면 산외로 939-26[화죽리 171]에 있다.
[변천]
1871년 김정희를 기리는 정려를 세웠고 1907년 울산 김씨를 기리는 정려를 세웠다.
[형태]
김해 김씨가 정려는 원래 잡석을 쌓아 기단을 만들고 시멘트 벽돌로 만든 담장으로 두르고 안에 석정려가 있었으나, 2020년 주변을 정비하였다. 정면은 사각형의 화강암을 2단으로 쌓아 보수하고, 주변도 같은 방식으로 둘렀다. 담장을 헐고 화강암으로 된 난간을 둘렀으며 바닥도 다듬은 화강암으로 정리하였다. 난간의 안쪽에 두 개의 석정려가 있다. 오른쪽은 김정희의 정려이고, 왼쪽은 울산 김씨의 정려이다. 정려는 모두 두 개의 화강암 기둥을 세우고 지붕 모양의 뚜껑돌을 올렸으며 뚜껑돌 아래쪽에 돌로 된 현판을 기둥에 끼운 형태이다.
김정희 정려의 정면에는 ‘효자 증통정대부 승정원좌승지 겸 경연참찬관 김정희지려 상지칠년경오 구월일 명정(孝子 贈通政大夫 承政院左承旨 兼 經筵參贊官 金廷熙之閭 上之七年庚午 九月日 命旌)’이라 쓰여 있고, 뒷면에는 ‘덕암공 효문명(德巖公 孝門銘)’이 있다. 효문명은 1871년 지현감(知縣監) 조중식(趙中植)[태인현감 재임 1871~1875]이 찬하였다. 석현판의 규모는 가로 69㎝, 세로 44㎝이다.
울산 김씨 정려의 정면에는 ‘열녀 학생 김기헌 처 유인 울산 김씨지려 성상사십이년 을사 정월 일 명정 정미 삼월 일 수(烈女 學生 金基憲 妻 孺人 蔚山 金氏之閭 聖上四十二年 乙巳 正月 日 命旌 丁未三月 日 竪)’라고 쓰여 있다. 즉, 1905년(고종 42) 명정되고, 1907년 세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석현판의 규모는 가로 69㎝, 세로 35㎝이다.
[현황]
김해 김씨가 정려는 2020년 주변을 정리하였으며, 김해 김씨 문중에서 잘 관리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