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300562
한자 鳳山 李氏 忠烈閭
이칭/별칭 이허량 정려,이허량 처 고흥류씨 정려
분야 종교/유교
유형 유적/건물
지역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쌍암동 산142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박노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623년연표보기 - 봉산 이씨 충열려 건립
이전 시기/일시 1873년 - 봉산 이씨 충열려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상동에서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교암동으로 이건
이전 시기/일시 1987년 - 봉산 이씨 충열려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교암동에서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쌍암동 산142로 이건
개축|증축 시기/일시 2019년 - 봉산 이씨 충열려 석정려로 개수
현 소재지 봉산 이씨 충열려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쌍암동 산142 지도보기
원소재지 봉산 이씨 충열려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상동 지도보기
성격 정려
양식 석정려
소유자 봉산 이씨 문중
관리자 봉산 이씨 문중

[정의]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쌍암동에 있는 봉산 이씨를 기리는 조선 후기 정려.

[개설]

봉산 이씨 충열려(鳳山 李氏 忠烈閭)는 1623년 봉산 이씨 이허량(李許樑)[1567~1597]과 아내 고흥 류씨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정려이다. 이허량은 본관이 봉산(鳳山), 자는 경언(擎彦)이다. 문정공(文靖公) 이수(李隨)의 11세손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이릉(李陵), 할아버지는 생원 이정인(李貞仁), 아버지는 종사랑 이민효(李敏孝)이다. 외할아버지는 손제맹(孫齊孟)이다. 정읍에서 태어났다.

이허량은 정유재란 때 정읍의 사치(沙峙)에서 일본군과 전투 중에 따르던 병사들이 모두 전사하자, 단신으로 칼을 들고 적진에 뛰어 들어 일본군 수십 명을 참살하고 몸에 십여 군데의 자상을 당하여 결국 전사하였다. 고흥 류씨는 영밀공(英密公) 류청신(柳淸臣)의 후손이다. 당시 고흥 류씨도 적의 포위 안에 있었는데, 남편의 전사 소식을 듣고 자결하려는 순간 일본군이 항복하라고 협박하자, “난을 당하여 국가에 목숨을 바친 것은 장부의 지절이요, 남편을 따라 죽는 것은 부인의 조행이니라. 차라리 네놈의 칼에 맞아 죽어 혼이 될지언정 네놈들에게 항복할 수 없다”라고 꾸짖었다. 그러자 적이 세 토막으로 베어 순절하였다. 일본군이 물러난 뒤 가족들은 부부의 시신을 거두어 월영산과 불각동에 장례를 치렀는데 무덤 위에 청백색의 빛깔이 무지개처럼 며칠 동안 사라지지 않으니 사람들이 충렬이 지극한 소치라 하였다고 한다. 조정에서 이러한 사실을 듣고 이허량과 고흥 류씨에게 정려를 내렸다. 아들은 이지영(李之英), 이지웅(李之雄), 이지호(李之豪), 이지준(李之俊)이다. 묘소는 월영산 불각동(佛覺洞)에 있으며 묘소 앞에 재실과 신도비가 있다.

[위치]

봉산 이씨 충열려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쌍암동 산142번지에 있다.

[변천]

봉산 이씨 충열려는 1623년 정읍시 상동 몰고개에 건립되었다. 1873년 교암동으로 이건하였고, 1987년 쌍암동 월영마을로 이건하였다. 2019년 석정려로 바꾸었다.

[형태]

봉산 이씨 충열려는 산기슭을 평탄하게 작업한 후 화강암으로 1단을 올리고, 위에 원형의 기초석을 올린 다음 4개의 화강암 기둥을 세우고, 위에 지붕 모양의 뚜껑돌을 올렸다. 네 개의 기둥에는 연꽃 모양을 새겼다. 중앙에 비석이 있다. 비석은 높이 145㎝, 폭 53.5㎝, 두께 23.5㎝이다. 비석 정면에는 ‘증통정대부 충신 봉산 이공허량 배숙부인 정열 고흥 류씨 충열비(贈通政大夫 忠臣 鳳山 李公許樑 配淑夫人 貞烈 高興 柳氏 忠烈碑)’라고 쓰여 있다. 뒷면에는 『노사선생문집(蘆沙先生文集)』 권 23에 있는 「정려기문」을 기록하였다. 「정려기문」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초산(楚山)[정읍의 별칭]고을 동쪽 사현(沙峴)[몰고개]의 아랫마을을 상리라 하는데, 예부터 작설정문(綽楔旌門)이 있다. 그 방제(榜題)에 증통정대부 이허량의 아내 증숙부인 고흥 류씨의 정려라고 하였다. 내[기정진]가 늙지 않았을 때에 친구들을 따라 여러 차례 그 아래를 지나면서 여러 사람을 따라 경례를 하였다. 돌이켜 보면 나같이 좁은 견문으로 류씨의 절개를 이룬 본말과 남편 가문의 관향을 상세히 알지 못하였는데, 금년[1873년(고종 14)]에 작설을 고을 남쪽 구암(九岩)으로 이전하니, 후손들이 이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전하는 일이 끝나자 이규열(李奎烈), 이태식(李台植), 이병관(李秉琯)이 우봉(牛峯) 이사어(李司禦), 은진 좨주(祭酒) 송병선(宋秉璿)이 지은 묘지(墓誌)와 묘표(墓表)를 간직하고 찾아와 사적을 기록하는 글을 부탁하였다. 나는 늙어서 글 짓는 일을 폐한 지가 오래였으나, 돌이켜 보면 옛날에 듣지 못하였던 바를 들었으므로 쾌하게 여기고 감히 침묵만을 지킬 수 없어 그 대략을 쓴다. 삼가 상고하여 보면 통정공(通政公)의 자는 경언이요, 본관은 봉산이다. 문정공 이수는 이허량의 10세조요, 현조(玄祖)는 생원 이정인(李貞仁)이며, 아버지는 종사랑 이민효(李敏孝)이다. 류씨 부인은 영밀공 류청신의 딸이다. 통정공은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럽고 절개가 있었는데, 만력(萬曆)[명나라 신종의 연호] 정유년[1597년(선조 30)] 왜적이 재차 침입하여 들어와 직산(稷山)을 전복시키고, 호남 지방으로 달려가는 길에 대로 연변의 민간을 마구 살해하였다. 이허량이 분개한 마음으로 도둑을 피하지 않고 마을의 청소년을 결속하여 기어이 도둑의 길을 막고 모조리 잡아 죽이려 하였다. 처음에는 수십 명의 도둑을 격멸하였으나, 끝내는 도둑의 세력이 커지면서 공격하므로 지탱하지 못하고 결국 해를 당하고 말았다. 부인은 이때 포위된 속에 있다가 도둑이 끌어내어 겁탈하려 하자, 부인이 크게 꾸짖어 말하기를 ‘의리에 죽은 남자가 있으니 어찌 절개에 죽은 여자가 없다 하겠느냐’ 하고, 개·돼지 같은 놈들이라며 배척하는 소리가 입에서 끊이지 않다가 결국 남편과 같이 생명을 잃었다. 집안 종들이 두 시신을 거두어 고을 동쪽 불각산(佛覺山)에 안장하였는데, 무덤 위에 푸르고 흰 빛이 감돌며 하루가 지나도록 흩어지지 않으므로 지방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겼다. 이 사실이 위에 알려지자 공에게 통정대부를 증직하고 부인은 공의 증직을 따르게 하였으며, 또 정문을 내리라는 명이 있었다. 아! 죽는 게 어려운 일이 아니요, 죽음에 대처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남자라도 오히려 그러한데, 더구나 부인이겠는가. 이러한 점이 국가에서 정문과 증직을 내리어 아름다운 덕을 포장(褒獎)한 것이다. 이 사실을 뚜렷이 도리[미(楣)]에 새기지 않는다면 어찌 오는 세대에게 어제의 일과 같이 소상하게 보이겠는가. 오늘 제군들의 일은 당연하다 하겠다.”

[현황]

봉산 이씨 충열려는 정면에 충열비(忠烈碑)가 있으며, 오른쪽에 충열려 사적을 기록한 비석, 왼쪽에 ‘유명조선국 통정대부 이공 신도비(有明朝鮮國 通政大夫 李公 神道碑)’, 신도비 옆에 신도비 번역문을 기록한 비석, 비석 옆에는 봉산 이씨 추모비가 있다. 위쪽에는 이수(李隨)의 신도비가 있다. 옆에는 제실이 있어 후손들이 잘 관리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봉산 이씨 충열려는 과거 정려각이었던 것을 관리상 어려움으로 석정려로 교체하거나 어려운 한자를 한글로 번역하여 새롭게 비석을 세우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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