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300620
한자 李舜臣
이칭/별칭 여해(汝諧),충무(忠武)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장순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45년 3월 8일연표보기 - 이순신 출생
활동 시기/일시 1576년 - 이순신 무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576년 - 이순신 함경도 동구비보권관 역임
활동 시기/일시 1580년 - 이순신 전라도 발포수군만호 역임
활동 시기/일시 1583년 - 이순신 건원보권관·훈련원참군 역임
활동 시기/일시 1589년 12월 1일~1591년 2월 1일 - 이순신 정읍현감 겸 태인현감 역임
활동 시기/일시 1591년 2월 13일 - 이순신 전라좌도수군절도사 부임
활동 시기/일시 1593년 8월 - 이순신 삼도수군통제사 제수
활동 시기/일시 1597년 2월 - 이순신 전라좌도수군절도사 겸 삼도수군통제사 파직
활동 시기/일시 1597년 7월 22일 - 이순신 전라좌도수군절도사 겸 삼도수군통제사 복직
몰년 시기/일시 1598년 11월 19일연표보기 - 이순신 사망
추모 시기/일시 1604년 - 이순신 선무공신 1등 녹훈
추모 시기/일시 1604년 - 이순신 덕풍부원군 추증
추모 시기/일시 1604년 - 이순신 좌의정 추증
추모 시기/일시 1793년 - 이순신 영의정 추증
출생지 인헌동 - 서울특별시 중구 을지로 18길 19[인헌동 1가 31-2]
부임|활동지 정읍시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묘소|단소 어라산 - 충청남도 아산시 음봉면 고룡산로 12-37[삼거리 산2-1]
사당|배향지 충민사 - 전라남도 여수시 충민사길 52-23[덕충동 1829]
사당|배향지 현충사 - 충청남도 아산시 염치읍 현충사길 126[백암리 298-1]
사당|배향지 충렬사 - 경상남도 남해군 설천면 노량로183번길 12[노량리 350번지]
사당|배향지 충렬사 - 경상남도 통영시 여황로 251[명정동 179]
성격 무신
성별
본관 덕수(德水)
대표 관직 정읍현감|진도군수|전라좌도수군절도사|삼도수군통제사

[정의]

조선 전기 정읍현감을 지낸 지방관이자 무신.

[가계]

이순신(李舜臣)[1545~1598]은 1545년 3월 8일 지금의 서울특별시 중구 을지로 18길 19[인헌동 1가 31-2]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덕수(德水)이며, 자는 여해(汝諧),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할아버지는 이백록(李百祿)이며, 아버지는 이정(李貞), 어머니는 변수림(卞守琳)의 딸 초계 변씨(草溪 邊氏)이다. 형은 이희신(李羲臣)·이요신(李堯臣), 동생은 이우신(李禹臣)이다. 아들은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이회(李薈)·이열·이면이다.

[활동 사항]

이순신은 1576년(선조 9) 식년 무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권지훈련원봉사(權知訓鍊院奉事)로 관직을 시작하였다. 함경도의 동구비보권관(董仇非堡權管), 1580년 전라도의 발포수군만호(鉢浦水軍萬戶)를 거쳐, 1583년 건원보권관(乾原堡權管)·훈련원참군(訓鍊院參軍) 등을 역임하였다. 1589년 전라도관찰사 이광(李洸)에게 발탁되어 전라도의 조방장(助防將), 선전관 등이 되었으며, 1589년 12월 1일 정읍현감으로 부임하여 1591년 2월 1일까지 1년 남짓 정읍 지역 지방관으로서 업무를 수행하였다. 당시 공석인 태인현감도 겸하였다. 이순신이 승진하여 떠나갈 때 백성들이 훌륭한 사또를 데리고 간다며 승진 반대 청원까지 냈다고 하며, 수령직을 겸직하였던 태인현에서는 이순신을 승진시키는 대신 태인현감으로 전임시켜 달라는 청원까지 있었다고 전한다.

이어 이순신은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만포첨사(滿浦僉使)·진도군수 등을 거쳐, 1591년 2월 3일 전라좌도수군절도사가 되었다. 『기언(記言)』에 따르면, 이순신을 전라좌도수군절도사로 천거한 인물은 좌의정 유성룡(柳成龍)이었다. 이로써 이순신은 “일찍이 북변(北邊)의 만호(萬戶)가 되어 반호(叛胡)를 토벌한 공이 많았으나 끌어 주는 사람이 없어서 10년 동안이나 조용(調用)되지 못하다가 이때 바로 정읍현감(井邑縣監)에서 호남수군좌절도사(湖南水軍左節度使)로 발탁”되었던 것이다. 이순신이 전라좌도수군절도사가 된 것은 당시로서는 대단히 파격적이었다. 사간원에서는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현감으로 아직 군수에 부임하지도 않았는데 좌수사로 임명하는 것은 대단히 심한 관작 남용이라며 반대하였다. 이에 선조는 인재가 모자란 상황에서 상규에 구애될 수는 없으며, 이순신이라면 충분히 감당할 수 있으니 관작의 높고 낮음을 따를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며 임명을 강행하였다. 이순신은 일본의 침략이 있을 것에 대비하여 전라좌도수군절도사로 부임하자 곧바로 좌수영(左水營)[현 전라남도 여수시]을 근거지로 삼아 전선(戰船)을 제조하고 군비를 확충하였으며, 군량 확보를 위하여 해도(海島)에 둔전(屯田) 설치를 조정에 요청하는 등 만반의 대처를 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이순신은 옥포대첩, 사천포해전, 당포해전, 1차 당항포해전을 승리로 이끌었으며, 한산도대첩에서 큰 공을 세웠다. 이어 안골포해전, 부산포해전도 승리로 이끌었다. 1593년에는 남해안 일대의 일본 수군을 완전히 일소한 뒤 한산도로 진영을 옮겨 1593년 8월 전라도·경상도·충청도의 수군을 총지휘하는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에 최초로 제수되었다. 지지부진하게 진행되던 중국과 일본 사이의 강화 회담이 결렬되자 일본은 1597년 재침략하여 왔다. 일본군의 재침 직전인 1597년 2월 이순신은 조정의 명령을 거역하였다는 죄목으로 전라좌도수군절도사 겸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면당하였다. 1597년 7월 칠천량해전에서 조선 수군은 괴멸 수준에 이르는 패배를 하고 지휘관 원균은 전사하였다. 1597년 7월 22일 이순신은 권율의 막하로 들어가 백의종군하고 있던 중 다시 전라좌도수군절도사 겸 삼도수군통제사로 복직하였다. 이순신은 명량해전에서 12척의 배로 133척의 적군과 대결하여 대승을 거두었으며, 조선은 빼앗긴 해상권을 회복하였다. 이듬해인 1598년 본국으로 퇴각하기 위하여 노량에 집결한 500척의 적선을 발견하고 선두에 나서 지휘하며 적을 추격하다 1598년 11월 19일 적의 총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학문과 저술]

이순신의 저서로는 1592~1598년 임진왜란 7년 동안 군중에서 쓴 『난중일기(亂中日記)』가 있다. 이순신의 행적·일화·인품·전언(傳言) 등을 망라하여 1795년(정조 19) 규장각검서 유득공(柳得恭) 등이 간행한 유고 전집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가 있다.

[묘소]

이순신의 묘소는 충청남도 아산시 음봉면 고룡산로 12-37[삼거리 산2-1] 어라산(於羅山)에 있으며, 선조가 친히 지은 비문과 충신문(忠臣門)이 건립되었다.

[상훈과 추모]

이순신은 1598년 우의정에 추증되었다. 1604년 선무공신(宣武功臣) 1등에 녹훈되었고, 덕풍부원군(德豊府院君)에 추봉되었으며,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1793년(정조 17) 다시 영의정이 더하여졌다. 사당으로는 경상남도 남해군 설천면 노량로183번길 12[노량리 350번지]의 충렬사(忠烈祠)와 경상남도 통영시 여황로 251[명정동 179]의 충렬사, 전라남도 여수시 충민사길 52-23[덕충동 1829]의 충민사(忠愍祠), 충청남도 아산시 염치읍 현충사길 126[백암리 298-1]의 현충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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