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300641 |
---|---|
한자 | 愼天翊 |
영어공식명칭 | Sin Cheonik |
이칭/별칭 | 백거(伯擧),호산(湖山),소은(素隱)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정우면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송만오 |
출생 시기/일시 | 1592년![]() |
---|---|
활동 시기/일시 | 1612년 - 신천익 증광시 문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659년 - 신천익 이조참판 제수 |
몰년 시기/일시 | 1661년![]() |
출생지 | 고부군 우일면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정우면
![]() |
거주|이주지 | 정읍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
사당|배향지 | 송양사 - 전라남도 영암군 덕진면 솔안길 7-14[노송리 302-1] |
성격 | 문신 |
성별 | 남성 |
본관 | 거창 |
대표 관직 | 이조참판|한성부우윤 |
[정의]
조선 후기 정읍 출신의 문신.
[가계]
신천익(愼天翊)[1592~1661]의 본관은 거창(居昌)이며, 자는 백거(伯擧), 호는 호산(湖山)·소은(素隱)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신희남(愼喜男)이고, 할아버지는 신여경(愼餘慶)이다. 아버지는 신인(愼諲)이고, 어머니는 부사용 이용(李溶)의 딸 덕수 이씨(德水 李氏)이다. 부인은 정랑 유동립(柳東立)의 딸 고흥 유씨(高興 柳氏)이고, 아들은 신성삼(愼聖三)·신육삼(愼六三)·신구삼(愼九三)·신재삼(愼再三)이다. 동생은 신해익(申海翊)이다.
[활동 사항]
신천익은 1592년(선조 22) 고부군 우일면[현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정우면]에서 태어났다. 조찬한(趙纘韓)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1612년(광해군 4) 진사시에 합격한 뒤 증광시 문과에서 을과 4위로 급제하였다. 1615년 홍문관정자를 거쳐 이조참의가 되었지만 광해군의 실정에 실망하여 사직한 뒤 낙향하여 영암 이우당(二友堂)에서 은거하며 지냈다. 인조반정 이후 홍문관과 사간원의 요직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신천익은 향리에서 의병을 일으켰고, 병자호란 때에는 김광혁(金光爀)과 함께 충청도관찰사 정세규(鄭世規)의 진중에서 싸우다가 강화(講和)소식을 듣고 어가를 호종하였다. 신천익은 효종 즉위 후 다시 관직에 나아가 홍문관부제학, 승지, 대사간, 이조참의, 대사성, 좌윤 등을 거쳐 1659년 이조참판에 임명되고 한성부우윤을 역임하였다. 이후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여 향리에서 후진 양성에 힘쓰며 지내다가 1661년(현종 2)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신천익의 저술로는 『소은유고(素隱遺稿)』 1권 1책이 전한다.
[상훈과 추모]
신천익은 지금의 전라남도 영암군 덕진면 솔안길 7-14[노송리 302-1]에 있는 송양사(松陽祠)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