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3007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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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崔重珍 |
영어공식명칭 | Choe Jungjin |
이칭/별칭 | 최진영(崔振泳) |
분야 | 종교/기독교 |
유형 | 인물/종교인 |
지역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정화 |
출생 시기/일시 | 187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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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시기/일시 | 1908년 - 최중진 평양장로회신학교 졸업 |
출가|서품 시기/일시 | 1909년 9월 6일 - 최중진 목사 안수 |
활동 시기/일시 | 1921년 - 최중진 조선노동공제회 정읍지회 총간사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923년 - 최중진 정읍 형평분사 고문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924년 - 최중진 조선일보 정읍지국장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927년 - 최중진 신간회 정읍지회 부회장 역임 |
몰년 시기/일시 | 1940년![]() |
출생지 | 정읍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
학교|수학지 | 평양장로회신학교 - 북한 평양시 |
활동지 | 최중진 활동지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
성격 | 종교인 |
성별 | 남성 |
대표 경력 | 매계교회 담임목사|조선일보 정읍지국장|신간회 정읍지회 부회장 |
[정의]
일제 강점기 정읍 출신의 개신교 목사.
[개설]
최중진(崔重珍)[1870~1940]의 아버지는 최석학이고, 어머니는 조성녀이다. 동생은 최광진(崔光珍)·최대진(崔大珍)이다. 최진영(崔振泳)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졌다.
[활동 사항]
최중진은 1870년 정읍에서 태어났다. 본래 한학을 수학하였으나 호남 지역 개신교 선교를 담당했던 미국 남장로회 선교사 L. B. 테이트(L. B. Tate)의 권유로 개신교에 입교한 후 선교사의 조사로 활동하였다. 1904년 테이트 선교사의 추천으로 평양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여 1908년 졸업하였다. 1909년 9월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열린 제3회 조선예수교장로회 독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후, 정읍·태인 지역의 교회를 담당하였다.
당시 전주와 군산은 미국 남장로회 선교부에서 설립한 선교 기지가 설치되어 있어서 선교사가 상주하며 미션학교와 병원 등을 통하여 선교 활동이 활발히 전개되었지만, 정읍·태인·고창·부안 등은 상대적으로 선교 여건이 열악하였다. 최중진은 미국인 선교사와 갈등을 빚다가 1910년 전북대리회에 다섯 가지 요구 사항을 제출하였다. 최종진의 요구는 선교 기관 운영 및 선교 구역 재조정 등 미국인 선교사와 조선인 목사 간의 형평성 보장과 더불어 교회가 전도뿐 아니라 구휼과 같은 사회적 문제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 등이었다. 전북대리회에 참석한 선교사와 목사, 장로 등은 최중진의 요구를 놓고 토론하였으나 결국 받아들이지 않고 당회권을 정지시켰다. 최중진이 끝까지 승복하지 않자 노회에 최중진의 목사 자격 중지를 요청하였고, 1910년 9월 열린 제4회 독노회에서 최중진의 파직이 결정되었다.
장로교회와 타협점을 찾을 수 없었던 최중진은 자신이 관할하던 태인·정읍·부안·임실 지역의 교회를 이끌고 자유교회(自由敎會)를 설립하였다. 최중진은 전북대리회에 보낸 답신의 발신인으로 ‘대한예수교 자유회 목사 최중진’이라고 적어 처음 자유교회란 말을 사용하였는데, 자유교회를 설립한 까닭은 자유로운 신앙 생활을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자유교회는 전라북도 지역을 넘어 전라남도 광주까지 세력을 확대하며 한때 20여 교회로 늘어나기도 하였다. 최중진은 평안북도에서 자유교회를 설립하였던 김원유(金元瑜)·차학연(車學淵)과 연합하여 자유교회 유지를 꾀하였다. 하지만 자유교회는 장로교회에 비하여 인적·물적 자원이 부족하였기 때문에 늘어난 교회에 대한 관리가 어려웠고, 장로교회 전도자들의 순방과 설득으로 장로교회로 돌아가는 일이 계속되었다. 더욱이 장로교회 예배당 불법 점거 및 정읍 매계 지역에 학교와 사택을 설립한 자금을 갚지 못한 일로 최중진이 고발당하여 2년간 목포형무소에 수감되면서 자유교회는 대부분 흩어졌다.
최중진은 1914년 석방된 후 다시 전라노회로 복귀하였으나, 차학연의 주선으로 다시 소속 교회를 이끌고 일본조합교회에 합류하였다. 이는 일본조합교회의 조선 전도가 가진 식민지성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결과였다. 최중진이 언제까지 일본조합교회에 소속되어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1931년 제25회 전북노회에서 다시 장로교회로 복귀하였다.
1920년대 최중진은 사회 운동가로 변모하였다. 1921년부터 조선노동공제회 정읍지회의 총간사로 활동하였으며, 1923년에는 정읍 형평분사(衡平分社)의 고문을 맡아 정읍 지역 형평 운동을 이끌며 백정에 대한 차별 대우 철폐를 주장하였다. 1924년 8월 조선일보 정읍지국장에 임명되었고, 1927년에는 신간회 정읍지부 설립 준비위원을 거쳐 정읍지회 부회장을 역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