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300004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병남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592년 6월 - 『조선왕조실록』과 태조어진 내장산 이안
특기 사항 시기/일시 1593년 7월 9일 - 『조선왕조실록』과 태조어진 아산과 묘향산으로 이안 시작

[정의]

임진왜란 시기에 『조선왕조실록』을 품은 정읍 지역의 내장산.

[개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선 정부는 1592년(선조 25) 6월 22일부터 1593년(선조 26) 7월 9일까지 전주사고에 있던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과 어진을 내장산으로 이안하여 보관하였다.

[일본군의 전라도 침입]

1592년 4월 13일 일본군은 아침 8시에 쓰시마섬에서 출발하여 오후 5시에 부산에 도착하였다. 1592년 4월 14일 부산성이 함락당하였고, 4월 15일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농소동 천곡마을 출신인 송상현(宋象賢)이 지키고 있던 동래성이 함락되고, 송상현은 전사하였다. 일본군이 침입하였다는 소식은 4월 17일에 한양에 알려지게 되었다. 4월 23일에는 성주가 함락당하였다. 당시 성주사고에 있던 실록은 사고 아래에 땅을 파고 묻었으나 일본군이 이를 알고 실록을 탈취하였다. 4월 28일에는 신립(申砬) 장군이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치고 일본군에 맞섰으나 결국 패배하고 충주가 함락되었다. 이때 충주사고에 있던 실록이 불에 타게 되었다.

선조는 몽진을 결정하였으며, 4월 30일 한성을 나와 북쪽으로 몽진길에 올랐다. 5월 3일 일본군이 한성에 진입하는 과정에서 춘추관에 있던 실록도 불에 타게 되었다. 임진왜란이 발생하기 이전에 실록은 춘추관과 성주, 충주, 전주 사고 등 4곳에 보관하고 있었는데, 전주를 제외하고 모두 불에 타거나 일본군의 손에 넘어가게 된 것이다. 선조는 5월 1일 개성에 도착하였다가, 5월 3일 출발하여 5월 7일 평양에 도착하였다. 이어서 5월 11일 평양을 출발하여 5월 13일 영변에 도착하였고, 6월 22일 의주에 도착하였다. 당시 전라감사 이광(李洸)[1541~1607]은 4월 29일과 5월 14일 두 차례에 여러 고을에서 근왕병(勤王兵)을 징발하여 10여만 명을 이끌고 출동하였다. 그러나 이광은 용인 전투[6월 5일~6월 6일]에 참가하였으나 패하고, 6월 15일 전주에 들어왔다.

일본군은 6월 1일 개경을 함락시켰다. 6월 14일 평양성이 함락되었다. 이 과정에서 선조는 몽진을 하였다. 일본군은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는 등 후방이 위험하게 되었다. 이에 일본군은 5월 초부터 점령지를 분할 지배하는 전략으로 작전을 변경하여 북방으로 올라갔던 일부 군대를 남쪽으로 돌려 각 지역으로 파견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5월 중순에 고바야카와 다카카케[소조천융경(小早川隆景)]는 서울을 출발하여 선산과 영동을 거쳐 무주와 금산 등 전라도 동북방으로 공격하게 되었다. 결국 일본군은 6월 23일 금산성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금산에 있던 일본군은 6월 말 진안을 점령하고 전주로 공격하려고 하였다.

[실록과 어진 이안 계획]

당시 전주에는 경기전에 태조의 어진과, 전주사고에 실록이 보관되어 있었다. 당시 전주사고에 보관되어 있던 전적류는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1591년 전주사고에서 포쇄를 하고 작성된 「포쇄형지안」에 기록된 실록과 각종 도서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먼저 실록은 『태조실록』 15권 15책, 『정종실록』 6권 6책, 『태종실록』 36권 36책, 『세종실록』 163권 164책, 『문종실록』 13권 13책, 『노산군일기』 14권 14책, 『세조실록』 49권 49책, 『예종실록』 8권 8책, 『성종실록』 297권 297책, 『연산군일기』 63권 67책, 『중종실록』 105권 105책, 『인종실록』 2권 2책, 『명종실록』 34권 34책으로 총 806권 810책이다. 『역서류(曆書類)』 34책, 『역대병요(歷代兵要)』 36책, 『고려사열전』 36책, 『진법외사서(陣法外史書)』 30책, 『고려사목록연표세가』 27책, 『고려지』 25책, 『고려열전』 18책, 『고려사절요』 35책, 『국조보감』 9책, 『고려사연표세계』 27책, 『고려지』 25책, 『고려열전』 18책, 『고려전사목록』 43책 중 1책 무, 『공안(貢案)』 8책, 『고려전사』 47책, 『고려사』 35책, 『교식추보(交食推步)』 2책, 『제범(帝範)』 1책, 『삼국절요』 7책, 『고려절요』 35책, 『고려절요』 21책, 『어제병장설(御製兵將說)』 3책, 『훈사(訓辭)』 6책, 『사후시(射侯詩)』 3책, 『어제교서부관자현상기(御製敎書付觀者現相記)』 3책으로 합계 534책이 보관되어 있었다.

실록은 임금도 볼 수 없는 서적이었다. 포쇄를 할 때에는 사관(史官)을 역임한 관리가 내려와서 포쇄를 하는 것이고, 내용은 볼 수 없었다. 만약 실록을 열람하고자 할 때에는 왕의 명령을 받은 사관을 역임한 관리가 해당 부분만을 볼 수 있을 뿐 다른 내용은 볼 수 없었다. 이처럼 실록의 관리는 매우 엄격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일반 관리나 민간인이 실록을 꺼낸다거나 하는 행동은 전혀 할 수 없었다.

일본군이 전주로 침입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전라도의 수뇌부는 이에 대처하려는 노력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용인 전투에 참가하였다가 6월 15일경에 전주에 돌아온 전라감사 이광을 필두로 하여 전라도 방어 계획과 더불어서 어진과 실록의 이안 계획을 수립하게 된다.

오희길의 『도암선생문집』과 황윤석의 『이재난고(頤齋亂藁)』나 『이재유고(頥齋遺稿)』 등에 수록된 여러 기록을 보면 전라도관찰사 이광을 필두로 도사 최철견(崔鐵堅)[1548~1618], 전주부윤 권수(權燧)[?~1592], 삼례찰방 윤길(尹趌)[1567~1615], 경기전참봉 오희길(吳希吉)[1556~1625]과 유인(柳訒, 柳認) 등이 참여하여 논의하였다. 처음에는 오희길의 『도암선생문집』에 기록된 것과 같이 사고의 아래에 땅을 파고 묻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전라도방어사 곽영(郭嶸)이 경상도 김천에서 붙잡은 일본군의 포로에게서 경상도 성주사고에 있던 실록 2장이 나왔다고 하여, 땅에 묻는 방법이 좋은 계책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실제로 『선조실록』 1592년(선조 25) 6월 28일에 “성주 사각(史閣)은 그런대로 남아 있지만 구덩이 속에 이안(移安)한 사궤(史樻)를 다 꺼내어 불태워 버렸으니 지극히 비통합니다”라는 기록이 있다. 곽영의 보고나 실록의 기록을 보면 일본군은 성주를 점령한 뒤에 사고 건물은 그대로 두고 사고 아래에 땅을 파고 묻은 사궤를 꺼내어 책은 태우거나 일본군들에게 나누어 주고, 사궤는 불태워 버린 것으로 보인다.

이에 이광 등은 실록 등을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으로 결정을 하고, 오희길에게 실록과 어진을 보존할 만한 깊고 험절한 곳을 찾도록 하였다. 이에 오희길은 김홍무(金弘武)와 수복 한춘(韓春) 등과 함께 전라도 일대를 둘러보고 와서 전라도사 최철견에게 바닷가로는 변산이 가히 이안할 만한 곳으로 급하면 바다로 피할 수 있으며, 육지로는 내장산에 있는 은적암이 잔로가 끊어졌다 이어졌다 하여 더욱 오랜 계책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이에 최철견과 유인, 홍기상, 윤길 등이 같이 가서 살펴보는데 용굴대[용굴암]에 도착하였으나, 은적암은 가히 바라볼 수는 있으나 올라갈 수 없었는데, 윤길이 올라 바라보고 결정을 내렸다.

당시 경기전에 있던 태조어진은 경기전참봉으로 있던 오희길과 유인이 전담하여 관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고에 있던 실록을 전담하는 사람은 없었다. 임진왜란 이전 사고는 성내에 있었으며, 해당 고을 수령이 관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담하는 관리가 없었던 것이다. 당시 사고에 있던 자료는 물량이 60여 상자나 되었다. 그런데 어진과 실록을 이안하기로 결정하였으나, 실록을 전담하여 관리한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오희길의 『도암선생문집』이나 양응수가 찬한 『백수선생문집(白水先生文集)』에 있는 「한계손공행장」 등에 따르면 이광 등은 능력과 지혜가 있는 2인을 선발하여 실록을 전담하도록 하려고 하였다. 이때 손홍록(孫弘錄)[1537~1600]과 안의(安義)[1529~1596]가 여기에 응하게 되었다. 당시 안의가 64세, 손홍록은 56세의 노구였으나 이미 태인에서 의병을 모으는 한편 군량을 모아 평안도 의주(義州)에 있던 행재소와 의병진에 보내는 일을 하고 있었다.

[내장산으로 이안]

내장산은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순창군, 전라남도 장성군에 걸쳐 있다. 내장산의 최고봉은 신선봉으로 높이는 763.5m이다. 면적은 80.708㎢이다. 내장산은 주화산(珠華山)에서 시작하여 내장산을 지나 전라남도 장흥군을 지나 영산강과 섬진강 사이를 지나 광양 백운산(白雲山)에서 끝나는 호남정맥의 중간에 있다. 내장산은 원래 본사인 영은사의 이름을 따서 ‘영은산(靈隱山)’으로 불리다가, 산 안에 감춰진 것이 무궁무진하다고 하여 안 내(內), 감출 장(藏) 자의 ‘내장산’으로 불리게 되었다. 내장산의 주요 봉우리는 신선봉(神仙峰), 연지봉(蓮池峰), 까치봉, 장군봉, 연자봉, 망해봉, 불출봉, 서래봉, 월령봉 등이 있다. 내장산 봉우리들은 대체로 동쪽으로 열린 말발굽 모양으로 둘러서 있다. 백양사가 있는 남부는 백암산이라고도 부른다.

내장구봉 안의 계곡물은 모여서 내장천을 이루며 정읍천(井邑川)을 경유하여 동진강 상류가 된다. 그리고 남동 사면의 물은 순창군 복흥면에서 추령천(秋嶺川)이 되어 섬진강에 흘러들고, 남서 사면의 물은 전라남도 장성의 장성호(長城湖)에 흘러들어 황룡강이 되어 영산강(榮山江) 상류를 이룬다. 산은 전체적으로 험준하고, 골짜기가 좁고 경사가 심하다.

조선 중종 이전에 내장산에는 636년(무왕 37) 영은조사(靈隱祖師)가 창건한 영은사(靈隱寺)가 있었다. 영은사의 가람 규모는 50여 동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660년 창건된 내장사가 있었다. 이 내장사는 지금의 벽련사 자리에 있었다. 영은사는 1098년(숙종 3)에 행안(幸安)이 전각과 당우를 새로 건립하고 중창하였다. 1539년(중종 34) 내장산의 승도탁란사건(僧徒濁亂事件)이 일어나자, 중종은 내장사영은사가 도둑의 소굴이라 하여 절을 소각하도록 하였다. 1557년(명종 12) 희묵(希默)영은사의 자리에 법당과 요사채를 건립하고 절 이름을 ‘내장사’로 고쳤다.

어진과 실록을 내장산으로 옮기기로 결정이 나고, 어진은 경기전참봉이었던 오희길과 유인이 전담하고, 실록은 자원한 안의손홍록이 전담하였으며, 최종 지휘는 오희길이 한 것으로 추정된다. 전주사고에 보관되어 있던 책자는 60여 상자였기 때문에 많은 인력이 필요하였다. 이에 안의손홍록은 집안에 있던 여러 인력과 물자를 동원하여 운반하였다. 이처럼 실록의 운반에는 오희길·유인 등 당시 경기전참봉, 안의·손홍록 등 지역 선비, 김홍무·한춘 등의 무사와 구실아치, 희묵을 비롯한 승려, 그리고 인근에서 소식을 듣고 모여든 용감한 백성 100여 명 등이 동원되어 내장산으로 운반하였다.

전주에서 내장산으로 이동한 노선에 대하여서는 알 수 없다. 다만 조진관(趙鎭寬)의 『가정집(柯汀集)』에 있는 「현감오공(희길)묘표(縣監吳公(希吉)墓表)」나 오희길의 『도암선생문집』에 있는 이기경이 찬한 「행장」에 간도(間道), 즉 샛길을 이용하였다고만 기록되어 있다. 전주에서 내장사로 가는 길은 전주시에서 출발하여 김제시 금구면, 정읍시 태인면, 정읍시를 거쳐 내장사로 가는 길과, 전주시에서 출발하여 완주군 구이면, 정읍시 산외면, 칠보면을 거쳐 내장사로 가는 길이 대표적인 노선이다. 금구, 태인을 거치는 노선은 관도이며, 구이면, 산외면, 칠보면을 지나는 길도 잘 알려진 노선이다. 하지만 당시 오희길이나 안의, 손홍록이 이용한 길이 어느 길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어진과 실록의 이안 일자]

어진과 실록이 내장산으로 이안된 날짜에 대하여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선묘실록』「봉안어용실록사적(奉安御容實錄事蹟)」에는 6월 3일, 양응수(楊應秀)가 찬한 「한계손선생행장」에는 6월 9일, 『여지도서』 보유편 전라도 정읍 고적 「용굴암」에는 6월 14일, 조경남의 『난중잡록(亂中雜錄)』에는 7월 9일 등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안의손홍록의 저술인 『임계기사(壬癸記事)』에 따르면 실록은 6월 22일 내장산에 도착하고, 6월 23일에는 용굴암에 있던 오희길과 유인은 산을 내려가고, 안의손홍록이 수직하였다고 되어 있다. 그러므로 실록은 6월 22일 이전에 전주에서 출발한 것으로 보아야 하지만 정확히 언제 출발하였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전주에서 정읍 내장산까지의 거리가 멀지 않으므로 도착한 당일 혹은 하루나 이틀 전에 출발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7월 1일 진전, 즉 태조어진이 비래암(飛來菴)으로 이안되었으며, 오희길이 시위(侍衛)[곁에서 호위함]한 것으로 되어 있다. 오희길과 유인은 6월 23일 산에서 내려가 7월 1일 진전[태조어진]을 가지고 용굴암으로 온 것이다. 어진도 마찬가지로 추정된다.

한편, 어진과 실록의 이안을 최종적으로 지휘한 사람은 전라도관찰사 이광이다. 이광은 6월 5일과 6일에 용인 전투에 참여하였다가 전주에 돌아온 것이 6월 15일경으로 알려져 있다. 전주에 돌아온 이광은 주변을 수습하고, 어진과 실록의 이안을 결정하고, 오희길을 시켜 이안지를 찾아보도록 하였으며, 최철견, 유인과 함께 내장산 은적암을 답사한 후, 최종적으로 은적암으로 옮기기로 결정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이 6월 15일 이후 6월 22일 이전에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최종 결정이 내려지고 실록이 먼저 출발한 시기도 이러한 점을 고려하여야 할 것이다. 하지만 출발 일자가 정확히 언제인지는 알 수 없다.

[내장산 조선왕조실록을 품다]

1592년 6월 22일 전주사고의 실록 등은 내장산 은봉암(隱峰庵)[은적암(隱寂庵)이라고도 한다]으로 옮겨졌으며, 7월 1일에는 태조어진이 용굴암(龍窟庵)으로 옮겨졌다. 은적암은 용굴암에서 바라보아 위쪽에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임계기사』에 따르면 실록은 7월 14일 은봉암에서 비래암(飛來菴)으로 옮겨졌다. 이후 9월 28일 어진도 다시 비래암으로 옮겼다. 비래암은 은적암보다도 더 안쪽에 있는 험난한 곳이었을 것으로 보이며, 이러한 사실은 조정에도 보고가 되었을 것이다. 11월 20일 신흠(申欽)이 와서 대사(大寺)[내장사]에 머물고는, 21일 비래암으로 와서 진전을 심안(審按)하고 전주로 출발하였다. 이때 실록 등에 대하여서도 살펴보았을 것이다. 11월 26일에는 11월 16일 교체된 오희길을 대신하여 경기전참봉이 된 구정려(仇廷呂)[또는 구정려(具廷呂)]가 처음으로 내장산에 들어왔다. 구정려의 호는 봉암(鳳岩)이며, 본관은 창원이고, 김제시 금구 출신이다. 1593년 3월 4일에는 유인을 대신하여 경기전참봉이 된 이도길(李道吉)이 대사에 와서 머물렀다. 이처럼 경기전참봉의 교체가 이루어지면서 오희길과 유인은 집으로 돌아가고, 구정려와 이도길이 수호인이 되었다. 그러나 안의손홍록은 처음부터 이안에 관여하였고, 강화도로 이안하는 과정까지 참여하였다.

『선조실록』 1593년(선조 26) 5월 5일 선릉과 정릉의 『개장도감』 내용이 기록되어 있으며, 전주사고본이 가장 완전하므로 춘추관 관원을 내려 보내 등서할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선조가 그렇게 하도록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임계기사』에도 5월 28일 오후에 봉교(奉敎) 조존성(趙存性)이 와서 선릉과 정릉의 묘지를 등서하여 갔다는 기록이 있다.

내장산에 어진과 실록을 보존하는 데에는 안의와 손흥록 외에도 내장사 주지였던 승병장 희묵을 중심으로 한 승병(僧兵) 1,000여 명이 참여하였다. 1539년(중종 34) 내장산의 승도탁란사건이 일어나, 중종의 명으로 내장사영은사가 소각되었고, 이후 1557년(명종 12) 영은사가 있던 자리에 법당과 요사채를 건립하고 절 이름을 ‘내장사’로 고쳤다. 희묵은 어진과 실록이 내장산으로 옮겨오자 승병을 조직하여 수호하였다. 한편 임진왜란정읍시 용산동 동구리 골짜기에 승병들이 쌓았다는 내장산성이 있다.

어진과 실록은 내장산의 용굴암, 은봉암, 비래암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록은 처음에는 은봉암으로 옮겨졌다가 후에 비래암으로 옮겼다. 어진은 처음에는 용굴암으로 왔다가 실록과 마찬가지로 비래암으로 옮겨졌다. 이 중 위치가 가장 분명한 곳은 용굴암이다. 『일성록』 1789년(정조 13) 4월 23일 기록에 “영은사는 본현[정읍현]의 동남쪽 30리에 있고, 절의 서쪽 7리 쯤 되는 곳에 용굴암의 옛 터가 있는데, 겨우 20여 척으로 산의 정상부에 있으며, [이곳에 이르는 길은] 돌고 돌아서 나무꾼도 역시 가지 않은 것이 이미 100여 년이나 되었다. 곁에 석굴이 있는데 30명~40명이 들어갈 수 있다. 혹은 이로 하여서 ‘용굴’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도 하는데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라고 하였다.

이처럼 내장사에서 용굴암까지는 돌고 돌아서 가야만 되고, 나무꾼들도 다니지 않을 정도로 산이 험하다고 되어 있다. 또한 길의 위쪽에 있으며, 동굴이 있다. 현재 내장사에서 까치봉으로 가는 금선계곡으로 오르다 보면 금선폭포가 있고, 위쪽에 용굴암이 있다. 『일성록』에 있는 기록과 흡사하다. 그리고 용굴암 주변에 건물지가 있었던 것이 확인되고 있다. 이러한 점으로 보아 실록을 옮긴 용굴암은 금선폭포 위쪽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은적암과 비래암의 위치에 대하여서는 여러 가지 구전만이 전하여 오고 있다. 구전을 통하여 은적암과 비래암에 대하여 몇 군데 지점이 알려져 있기는 하지만 정확한 장소라고 하기에는 아직 자료가 미비하다. 이에 대하여서는 좀 더 조사가 필요하다.

[내장산을 떠난 실록]

내장산에 있던 어진과 실록은 1593년에 정읍현을 거쳐 묘향산으로 옮겨진다. 『선조실록』 1593년(선조 26) 7월 9일 기록에는 태종대왕의 수용(睟容)[어진]과 선왕의 실록을 전라도감사가 도내의 험고한 곳에 간직하여 두었는데, 일본군이 호남을 침범하려 하므로 전주부윤 이정암(李廷馣)이 불의의 변고가 있을까 염려하여 행재소 근처로 옮기자고 하였다. 또한 사관을 보내어 감사와 상의하여 옮기자고 하자, 선조가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임계기사』에 따르면 실제 1593년 7월 9일 정읍현감 유탁(兪濯)[1544~1618]이 수용과 실록을 정읍현으로 옮긴 것으로 되어 있다. 유탁은 본관이 창원이고, 1582년(선조 15) 실시된 임오식년시에 급제하였다. 유탁은 1593년(선조 26) 12월 15일 경기도사에 제수되었다. 이후 삼사(三司)의 여러 관직과 승지를 역임하였다.

이와 같이 1593년 7월 9일 『조선왕조실록』과 어진을 이송하였다. 7월 9일 정읍현감 유탁의 주도로 정읍현에 옮기고, 7월 11일 손홍록안의를 배행차사원(陪行差使員)으로 임명하여 어진과 『조선왕조실록』을 싣고 정읍을 출발하여 태인현, 익산군, 용안현[현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용안면 일대에 있던 옛 고을 이름], 임천군[현 충청남도 부여군 임천면 일대에 있던 옛 고을 이름], 부여현, 정산현[현 충청남도 청야군 정산면·목면 일대에 있던 옛 고을 이름]을 경유하여 19일에 아산현에 도착하였다.

이때는 일본이 한양에서 퇴각하여 경상도로 물러가 있었으며 전쟁이 소강상태에 있었으므로 충청도검찰사(忠淸道檢察使) 이산보(李山甫)가 어진을 행재소까지 모시기 어렵다고 선조에게 진언하였고, 선조는 어진을 아산현에 안치하고 『조선왕조실록』은 해주목으로 운반하도록 전교하였다. 그 뒤 『조선왕조실록』은 해주에서 강화도를 거쳐 다시 묘향산으로 옮겨졌다.

임진왜란이 끝난 이후 전주사고본 『조선왕조실록』을 기초로 1603년 7월부터 1606년 3월까지 2년 9개월 사이에 『태조실록』부터 『명종실록』까지 804권의 교정본 『조선왕조실록』을 편찬하였고, 교정본 3부를 활자로 출판하였다. 이리하여 『조선왕조실록』은 전주사고에 있던 원본과, 간행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교정본을 합하여 5부가 있게 되었다[『선조실록』 1606년(선조 39) 4월 28일].

5부 중 1부는 옛날과 같이 서울 춘추관에 두고 다른 4부는 강화도 마니산(摩尼山), 경상북도 봉화군 태백산(太白山), 평안북도 영변군 묘향산(妙香山), 강원특별자치도 평창군 오대산(五臺山)과 같이 병화를 피할 수 있는 심산유곡과 섬을 택하여 사고를 설치하고 1부씩 분장하였다. 춘추관·태백산·묘향산에는 신인본(新印本), 마니산에는 전주사고본, 오대산에는 교정본을 각각 봉안하였다.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