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300498
이칭/별칭 용굴암,은봉암,비래암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유적/터
지역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내장동 산231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김병남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굴 조사 시기/일시 2011년 - 정읍 내장산 조선왕조실록 보존터 발굴 조사
문화재 지정 일시 2015년 7월 24일연표보기 - 정읍 내장산 조선왕조실록 보존터 전라북도 기념물 제130호 지정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21년 11월 19일 - 정읍 내장산 조선왕조실록 보존터 전라북도 기념물로 변경 지정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24년 1월 18일 - 정읍 내장산 조선왕조실록 보존터 전북특별자치도 기념물로 변경
소재지 정읍 내장산 조선왕조실록 보존터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내장동 산231 지도보기
성격 보존터
소유자 내장사
관리자 내장사
문화재 지정 번호 전북특별자치도 기념물

[정의]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내장동 내장산에 있는 조선 후기 임진왜란 당시 조선왕조실록과 어진을 보존하였던 터.

[실록 이안 과정]

1592년(선조 25) 4월 13일 일본군은 오전 8시 쓰시마에서 출발하여 오후 5시 부산에 도착한다. 4월 14일 부산성이 함락당하고, 4월 15일 전라북도 정읍시 농소동 천곡마을 출신인 송상현(宋象賢)이 지키고 있던 동래성이 함락되고, 송상현은 전사하였다. 일본군이 침입하였다는 소식은 4월 17일 한양에 알려지게 되었다. 4월 23일 성주가 함락당하면서 사고가 불에 타고, 땅을 파고 묻어 두었던 실록이 일본군의 수중에 넘어가게 되었다. 선조는 의주로 몽진하고, 후방에서 의병 활동이 활발하여지자, 일본군은 5월 초부터 작전을 변경하여 전라도로 들어가려는 계획을 세운다. 이에 전라도에서는 전라도관찰사 이광(李洸)을 중심으로 전라도를 방어하기 위한 대비책과 함께 경기전에 있던 태조의 어진과 사고에 있던 실록을 이안하기 위한 계획을 수립한다. 당시 경기전에 있던 태조 어진은 경기전참봉 오희길(吳希吉)과 유인(柳訒)이 전담 관리하고 있었으나, 실록을 전담하는 관리는 없었다. 이때 관찰사 이광은 오희길을 시켜 어진과 실록을 옮길 장소를 물색하도록 하고, 오희길은 내장산을 추천하였다. 이처럼 실록 등을 내장산으로 옮기기로 결정하였으나, 실록 등을 옮길 만한 인력과 이후 수호할 인력이 문제가 되었다. 결국 이광은 도내에서 재능과 덕행이 있으면서 슬기로운 생각이 있는 사람 2인을 모집하여 경기전참봉들과 함께 실록을 보전하게 하려고 하였다. 이때 태인에 거주하던 안의(安義)손홍록(孫弘祿)이 참여하게 되었다. 오희길의 지휘에 따라 다른 경기전참봉인 유인, 지원한 손홍록, 안의와 더불어 용맹하고 담력이 큰 사람으로 김홍무(金弘武) 등과 더불어 어진과 실록, 제사용 은그릇 등을 내장산으로 옮겼다.

당시 전주사고에 보관되어 있던 전적류는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1591년 전주사고에서 포쇄를 하고 작성된 「포쇄형지안」에 기록된 전주사고에 보관된 실록과 각종 도서와 차이는 없었을 것이다. 「포쇄형지안」에 수록된 도서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먼저 실록은 『태조실록』 15권 15책, 『정종실록』 6권 6책, 『태종실록』 36권 36책, 『세종실록』 163권 164책, 『문종실록』 13권 13책, 『노산군일기』 14권 14책, 『세조실록』 49권 49책, 『예종실록』 8권 8책, 『성종실록』 297권 297책, 『연산군일기』 63권 67책, 『중종실록』 105권 105책, 『인종실록』 2권 2책, 『명종실록』 34권 34책으로 총 806권 810책이 있었다. 이 외에 『역서류(曆書類)』 34책, 『역대병요(歷代兵要)』 36책, 『고려사열전』 36책, 『진법외사서(陣法外史書)』 30책, 『고려사목록연표세가』 27책, 『고려지』 25책, 『고려열전』 18책, 『고려사절요』 35책, 『국조보감』 9책, 『고려사연표세계』 27책, 『고려지』 25책, 『고려열전』 18책, 『고려전사목록』 43책 중 1책 무, 『공안(貢案)』 8책, 『고려전사』 47책, 『고려사』 35책, 『교식추보(交食推步)』 2책, 『제범(帝範)』 1책, 『삼국절요』 7책, 『고려절요』 35책, 『고려절요』 21책, 『어제병장설(御製兵將說)』 3책, 『훈사(訓辭)』 6책, 『사후시(射侯詩)』 3책, 『어제교서부관자현상기(御製敎書付觀者現相記)』 3책으로 합계 534책이 있었다. 책궤(冊櫃)로는 60여 상자였다.

오희길 등이 실록 등을 내장산으로 이안한 일자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다. 『선묘실록』에 있는 「봉안어용실록사적(奉安御容實錄事蹟)」에는 6월 3일, 양응수(楊應秀)가 찬한 「한계손선생행장」에는 6월 9일, 『여지도서』 보유편 전라도 정읍 고적 「용굴암(龍窟菴)」에는 6월 14일, 조경남의 『난중잡록』에는 7월 9일 등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안의손홍록의 저술인 『임계기사』에는 실록이 6월 22일 내장산에 도착하고, 어진은 7월 1일 도착한 것으로 되어 있으므로 6월 22일 이전에 전주에서 출발한 것으로 보아야 하지만 정확한 출발 일자와 경로는 명확하지 않다.

[보존터]

『임계기사』에 따르면 실록은 6월 22일 내장산 은봉암(隱峰菴)으로 옮겨졌으며, 7월 14일 비래암(飛來菴)으로 옮겼다. 어진은 7월 1일 용굴암에 처음 보관되었다가, 9월 28일 역시 비래암으로 옮겼다. 이후 1593년 7월 9일 정읍현으로 옮겨질 때까지 비래암에 있었다. 이처럼 실록과 어진은 내장산의 용굴암, 은봉암, 비래암에 있었다. 이 중 현재 위치가 명확하게 파악되는 곳은 용굴암이다. 용굴암은 용굴대, 용굴사(龍窟寺)라고도 한다. 내장사의 남쪽에 있는 계곡을 따라 서쪽, 까치봉 방향으로 이동하면 금선계곡에 이르는데 골짜기 위쪽에 있는 바위굴이 용굴암이다. 현재는 바위굴로 되어 있으나 과거에는 굴 앞에 암자가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은봉암은 은적암(隱寂菴)이라고도 한다. 은봉암의 위치에 대하여 황윤석(黃胤錫)의 『이재난고』 도암오공전(鞱庵吳公傳)에서 어진과 실록을 옮길 곳을 찾아 내장산 은봉암으로 가기 위하여 용굴암에 도착하였으나 용굴암에서 보이기는 하지만 올라갈 수 없었다고 되어 있다. 현재 은적암 또는 은봉암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실록과 어진이 옮겨진 비래암에 대하여서는 용굴암이나 은적암보다 더욱 험절한 곳에 있어 옮겼다는 기록만 전할 뿐 정확한 위치에 대한 기록이 없다. 어진과 실록은 비래암에 있다가 정읍현을 거쳐 강화도로 이동하였다.

[위치]

정읍 내장산 조선왕조실록 보존터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내장동 산231 일대이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정읍 내장산 조선왕조실록 보존터는 2011년 전북대학교 박물관에서 보존터를 확인하기 위한 기초 발굴 조사를 실시하였다. 발굴 조사 결과 추정 지역에서 건물터 등이 확인되었으나, 은적암이나 비래암이 명확하다는 것을 알려 주는 자료는 발굴되지 않았다.

[현황]

정읍 내장산 조선왕조실록 보존터 중 은적암과 비래암의 위치는 명확하지 않고, 용굴암 앞에는 안내판을 설치하여 관리하고 있다. 정읍 내장산 조선왕조실록 보존터(井邑 內藏山 朝鮮王朝實錄 보존터)는 2015년 7월 24일 전라북도 기념물 제130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보호법시행령」 고시에 따라 지정 번호가 삭제되어 전라북도 기념물로 변경되었다. 2024년 1월 18일 전북특별자치도 기념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의의와 평가]

정읍 내장산 조선왕조실록 보존터는 세계기록유산인 『조선왕조실록』이 현재까지 전하게 된 과정을 살필 수 있는 유적으로 역사적 가치가 매우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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