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3000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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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칭/별칭 | 태인 고현 향약(泰仁 古縣 鄕約)l고현향약(古縣鄕約)l고현동약(古縣洞約),태산향약(泰山鄕約),태산 고현동약(泰山 古縣洞約),무성향약(武城 鄕約)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칠보면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장순순 |
[정의]
조선 전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정읍 지역에서 시행된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주도 자치 규약이자 단체.
[개설]
조선 시대 전라도 태인현은 오늘날의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의 일부인 칠보면, 태인면, 산외면, 북면 등을 아우르는 지역이다. 전라도 감영이 있던 전주부를 비롯하여 임실현, 순창군, 정읍현, 고부군, 금구군과 경계를 맞대고 있어서 연결되는 도로가 교차하는 교통의 요지였다. 고현동(古縣洞)은 ‘옛날 군현의 치소(治所)가 있던 마을’이라는 뜻으로, 태인현 고현동에는 백제 시대 대시산군(大尸山郡)과 통일 신라 시대 이후 태산군(泰山郡)의 치소가 있었다. 조선 초인 1409년(태종 9)에 태산군이 이웃한 인의현(仁義縣)과 합쳐져 태인현(泰仁縣)이 되었다. 오늘날의 태인면 소재지 근처인 거산역(居山驛)으로 태인현의 치소가 옮겨 가면서 고현동으로 불리게 되었다. 고현동은 지금의 정읍시 칠보면 시산리, 무성리 일대로 시산(詩山)과 성황산(城隍山) 등의 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벼농사에 유리한 지역이어서 대대로 태인현의 대표적인 양반 가문들이 거주하여 왔다. 태인 고현동 향약(泰仁 古縣洞 鄕約)은 1475년(성종 6) 정극인(丁克仁)[1401~1481]이 고현동에 살면서 시행한 향약·향음주례에서 시작되었으며, 이후에도 계속된 5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주도 향촌 자치 규약이자 단체이다.
[조선의 건국 세력, 유교적 이상 사회의 건설을 꿈꾸다]
조선의 건국 세력은 성리학을 국시로 삼아 유교적인 이상 사회의 실현을 꿈꾸었다. 사회 각 방면에서 고려적 요소인 불교 중심의 문화를 유교 문화로 바꾸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향약의 시행은 그러한 노력 가운데 하나이다. 건국 초기 조정에서는 향음주례·향사례를 통하여 향촌 주민 간의 위계 질서를 확립하고자 하였다. 특히 향음주례는 중국 고대 주대(周代)의 예법으로 향촌 내에 나이 많은 사람을 존중하기 위하여 시행되었다. 이후 향촌 사회의 교화에 관심이 있던 사림들은 주자가 편집한 『여씨향약(呂氏鄕約)』을 받아들여 향촌 사회를 유교적으로 변화시키려 하였다. 16세기 초에 조광조(趙光祖) 등 사림파들은 향약 보급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선조 대에 이르러 전국적인 시행을 보게 되었다. 이황의 예안향약(禮安鄕約)과 이이의 서원향약(西原鄕約)·해주향약(海州鄕約)이 대표적이다. 향약의 대체적인 내용은 마을 사람들끼리 좋은 일을 서로 권하고[덕업상권(德業相權)], 나쁜 일은 서로 규제하고[과실상규(過失相規)], 올바른 예절과 풍속을 서로 지키며[예속상교(禮俗相交)], 어려운 일은 서로 돕는다[환난상휼(患難相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의 향약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그 내용이 다양하였다.
[불우헌 정극인, 태인 고현동에서 향약과 향음주례를 시행하다]
정극인은 본래 광주(廣州) 두모포(豆毛浦)[현 서울특별시 성동구 옥수동]에서 태어나 본관인 전라도 영광에서 거주하였다. 1429년(세종 11)에 생원시에 급제하여 20여 년 동안 성균관 유생으로 지내다가 처가가 태인이었던 이유로 1470년(성종 1) 태인현의 고현내로 낙향하였다. 정극인은 고현내에서 3간의 작은 집을 지어 ‘불우헌(不憂軒)’이라 칭하고, 관직에 나간 기간을 제외하고는 후진의 교육과 향리의 교화 및 자치 운동에 힘썼다. 정극인은 지역 사회에 유교적인 기풍을 뿌리 내리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정극인은 고현동 양반가의 화목과 질서 유지를 위하여 1475년 향약과 향음주례를 시행하였다. 향음주례는 마을의 질서를 세우려는 목적에서 유생들이 어른을 모시고 예법에 따라 술을 마시며 모임을 갖는 의식이다.
정극인이 쓴 「태인고현동중향음서(泰仁古縣洞中鄕飮序)」에 따르면, “향음주례를 거행하여 이웃 사람들과 화목하게 지내는 규약을 만들었다. 예(禮)의 글·예의 그릇·예의 쓰임이 비록 옛날의 법도에 맞지는 않지만, 공경[敬]·화목[和]·염결[潔]·효도[孝]·우애[悌]·겸손[遜]을 가르쳐 법도에 따라 어긋나지 말라. 사치와 음란함에 대처하는 방법을 가르치고 욕심에 마음을 맡기는 것을 경계하고 삼간다면 어찌 마을 사람들 간의 친목만 도모할 뿐이겠는가”라고 하여 향음주례의 실시와 동회를 조직한 목적을 밝히고 있다. 정극인에게 향약과 향음주례를 실시하는 목적은 마을 사람들 간의 화목을 도모하고, 나아가 풍속을 바꿈으로써 양반 중심의 사회 질서 확립과 이상적인 유교 사회의 구현에 있었다. 더불어 동회의 활동을 규정하는 동약(洞約)과 동원의 명부인 동안(洞案)을 작성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1510년(중종 5) 같은 마을의 송세림 등에게 계승되었으며, 이후 지역 사회에서 계승·발전하였다.
[고현향약은 우리나라 최초의 ‘순수한’ 향약이다]
고현향약은 제작 실시 연대가 이황과 이이의 향약보다 훨씬 앞선다. 그뿐만 아니라 『여씨향약』이나 『증손여씨향약(增損呂氏鄕約)』을 한국적인 향풍(鄕風)에 맞도록 개작한 두 사람의 것과는 달리 향음주례에 기초한 것이었다. 따라서 고현동 향약은 우리나라 최초의 ‘순수한’ 향약이라고 할 수 있다. 정극인의 「태인고현동중향음서」를 보면 정극인이 향약을 만들어 실시할 당시에는 조문과 기구 및 방법 등을 자세하게 규정한 규약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현재는 전하지 않고, 향약의 ‘서(序)’만이 남아 있다. 따라서 정극인이 만든 초기 향약의 내용은 명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정극인이 노래한 시 「태인향약계축(泰仁鄕約契軸)」[『불우헌집』 권1]에서 “인륜 다섯 가지 가운데[인륜유오(人倫有五)]/ 붕우가 그 하나라네[붕우거일(朋友居一)]/ 함께 이 세상에 살면서[병생사세(並生斯世)]/ 얻기 어렵다는 말이 있지[호왈난득(號曰難得)]/ 더구나 같은 고을에서[신동일향(矧同一鄕)] / 조석으로 따라 노닒에랴 [종유조석(從遊朝夕)]/ 벗으로서 인을 도움을[이우보인(以友輔仁)] /곧 유익한 세 벗이라 하네[시위삼익(是謂三益)] / 정성과 믿음으로 계를 이루니[작계성신(作契誠信)] / 끈끈한 정이 교칠과 같다네[유교여칠(猶膠與漆)] / 경사엔 반드시 하례하고[길경필하(吉慶必賀)]/ 우환엔 반드시 구휼하네[우환심휼(憂患心恤)] …… 우리 모든 계원은[범아동맹(凡我同盟)]/ 마땅히 공경하고 본받아야 하리[최의긍식(最宜矜式)]/ 말로는 뜻을 다하지 못하여[언부진의(言不盡意)]/ 거듭 약조를 하네[중위지약(重爲之約)] …… / 교묘하게 속이는 갖은 행위[다반교사(多般巧詐)]/ 그 덕을 돌아보지 않음이니[불휼기덕(不恤其德)]/ 어찌 정성과 믿음일까[기왈성신(豈曰誠信)]/ 신명이 벌하리라[신명기극(神明其殛)]/ 어찌 정성과 믿음일까[기왈성신(豈曰誠信)]/ 죄가 있으면 마땅히 축출당하리[죄당출복(罪當黜伏)]”라고 되어 있어서 초기 고현동 향약의 내용은 미루어 짐작할 수는 있다.
[500여 년의 전통, 태인 고현동 향약의 운영과 참여한 사람들]
현 정읍시 칠보면 시산리 남전(藍田)마을의 동약당(洞約堂)에는 『고현동약좌목(古縣洞約座目)』·『태산향약안(泰山鄕約案)』·『고현동약안(古縣洞約案)』·『고현동각수계안(古縣洞閣修稧案)』·『고현향약규례(古縣鄕約規例)』·『고현향약안(古縣鄕約案)』·『고현동약지(古縣洞約誌)』·『태산고현동약비문(泰山古縣洞約碑文)』 등 29책의 고현동 향약에 관한 문건들이 필사본으로 보존되어 있다. 향약에 관한 문건들의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현동 향약은 고현동약·태산향약·태산고현동약·태인고현동약·무성향약(武城鄕約) 등 여러 가지로 불리어서 명칭이 일정하지 않다. 이런 다양한 명칭의 사용은 고현동 향약이 실시된 칠보면 시산리 일대의 역사 지리적인 상황의 전개에 기인한다.
고현동 향약 문건은 1910년 이전 것이 19책이고, 나머지 10책은 근현대에 작성된 것이며, 시기에 따라 형식과 내용이 모두 다르다. 가장 오래된 책은 1602년(선조 35)에 작성된 『동안(洞案)』으로, 향약 구성원의 명단인 좌목(座目), 정극인과 송세림이 쓴 향음주례에 관한 서문과 발문인 정극인의 「태인고현동중향음서」와 송세렴의 「발동중향음서(跋洞中鄕飮序)」가 실려 있다. 정극인의 「태인고현동중향음서」와 송세렴의 「발동중향음서」 두 글은 고현동 향약을 세우고 정착시킨 정극인과 송세림의 향약 정신을 계승 발전 시킨다는 의미에서 이후 고현동 향약 문서에 대부분 실려 있다. 조선 시대 마지막 향약은 『고현동각수계안』으로 1901년(광무 5)에 만들어진 것이다.
현존 문서 가운데 가장 오래된 규약은 1666(현종 7)의 『동중좌목(洞中座目)』의 「중수입의(重修立議)」이다. 이 규약에서 “향약에 참여한 사람의 집에 사람이 죽어 장례를 치르게 되면 일꾼 70명을 주고, 서얼은 30명을 지급한다. 향약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은 지급하지 않는다”라고 하여 향약 참여자 상호 간에 상례에 협조하였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1677년(숙종 3)의 『동안』, 「동안중수입의(洞案重修立議)」에서는 향약 참여자들이 상례 외에 혼례에서도 서로 돕는 것으로 전개되었다.
1683년(숙종 9)의 『고현동약좌목』, 「입의(立議)」에는 이전과 다른 몇 가지 특징이 보인다. 첫째 이전에는 등재되지 않았던 서얼 등 중서층(中庶層)이 동안에 기록되어 있으며, 일반 백성에 대한 규제가 구체적으로 나와 있다. 이는 향약에 서얼 등 중서층이 참여하였으며, 마을 거주 일반 백성들도 향약의 규제를 받기 시작하였음을 시사한다. 둘째, 부모에게 불효하거나 형제 간에 우애가 없거나 이웃과 사이좋게 지내지 않거나 서로 싸우는 자의 행적을 기록하여 향약 참여자들이 모두 모였을 때 해당자를 처벌하였다.
18세기 초인 1704년(숙종 30)에 작성된 『태산향약안』에는 양반과 일반 백성이 상·하계(上下稧) 형태로 기재되어 있어서 해당 시기의 향약이 마을 주민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향약으로 발전하였음을 보여 준다. 17세기 고현동 향약이 마을 사람들 간의 질서 확립에 주목하였다고 한다면, 18세기 향약은 참여자들의 경제적 상부상조를 중시하였으며, 향약 담당자가 규약을 한글로 옮겨 일반 백성들도 자세히 알도록 하였다. 이후 1713년(숙종 39) 『동안』에서는 경제적 측면을 더욱 중시하였다. 첫째, 동(洞)의 공동 물건을 사용할 때 이용 가격을 정하였으며, 둘째, 향약 참여자가 아닌 사람도 특별한 경우 경제적으로 후원을 받았다. 셋째, 토지나 노비가 없는 향약 참여자가 전염병에 걸려 생명이 위급한 경우 공동 곡식을 제공하였다. 이러한 성격의 규약은 1741년(영조 17)까지 지속적으로 시행되었다.
고현동 향약은 19세기에 들어서면서 경제적인 규약이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 1801년(순조 1) 향약을 진흥시키려는 고을 현감 서유응(徐有鷹)의 의지가 반영된 『고현향악안』에는 좌목 없이 규약만 실려 있다. 18세기 『태산향약안』에서는 좋은 일을 서로 권하고 어려운 일은 서로 돕는다는 조목만 나오는데, 『고현향악안』에서는 나쁜 일은 서로 규제하고 올바른 예절과 풍속을 서로 지킨다는 조목이 추가되었다. 더불어 “이 약조는 명분을 바로 잡고 풍속을 두텁게 하는 방법이니, …… 만약 이로 인하여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능멸하여 도리어 힘없는 백성을 병들게 한다면 참으로 불행한 일이니 각별히 유념하라”라고 하여, 향약 시행의 부작용을 우려하는 모습도 나오고 있어서 향촌 기강을 주도적으로 확립하려 한 이전 시기와 차이를 보인다.
『동계좌목』에는 숙종 때 다시 만들어진 ‘동안’과 ‘고현동계좌목’이 수록되어 있다. ‘고현동계좌목’에는 양반으로 구성된 상계와 일반 백성으로 구성된 하계의 명단이 함께 수록되어 있다. 이 시기부터 일반 백성들이 향약에 참여하고 있다. 『고현동향약안』에서는 당시 태인현감이 향촌 사회를 안정시키려는 정조의 뜻에 따라 향약을 진흥시키려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고현동향약안』의 향약은 수령의 서명과 관인이 찍혀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전의 향약과 성격이 다소 달라지면서 1829년(순조 29), 1854년(철종 5), 1901년(광무 5) 향약에서는 향약의 보관 장소인 동각·동학당(洞學堂)의 보존과 참여자의 교육에 치중하여 단순히 교육을 강조하는 양상을 띤다. 그리고 향약 참여자의 수가 증가하였고, 참여자의 나이도 낮아졌는데, 이는 이 시기 향약이 참여자의 교육에 치중하였음을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고현향약 최초의 마을 향약이자 가장 오래 지속된 향약]
고현동 향약은 현대에 이르기까지 지속되었다. 일제 강점기인 1928년에 『동각계안(洞閣稧案)』이 작성되었으며, 해방 후에는 1954년과 1974년에 『고현동약(古縣洞約)』, 『고현동약안(古縣洞約案)』이 작성되었다. 이들 문건에서는 정극인의 「태인고현동중향음서」와 송세렴의 「발동중향음서」를 비롯하여 작성 당시 고현동 지역 명사의 발문이 기재되어 있고, 좌목의 앞에 계장(稧長)·약장(約長)·교정(校正)·직월(直月)·직일(直日)·사서(司書) 혹은 유사(有司)·재무(財務) 등의 임원들이 따로 기재되어 있어서 고현동 향약의 역사성을 잘 보여 준다. 고현동 향약은 『여씨향약』이나 『증손여씨향약(增損呂氏鄕約)』을 한국적인 향풍(鄕風)에 맞도록 개작한 율곡과 퇴계의 향약 이전부터 시작되었으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500여 년 동안 지속적으로 시행되었다는 점에서 조선 시대 향촌 사회의 삶은 물론, 현대 한국 사회와의 연속성을 연속적으로 그리고 입체적으로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지방 사회에 유교를 토착화하려 시행한 향약 가운데 양적인 측면에서나 질적인 측면에서 내용이 가장 충실하게 남아 있는 배경에는 마을에 최치원을 모신 서원인 정읍 무성서원을 중심으로 향약이 제대로 유지되어 온 것에도 연유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