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풍류문화를 찾아서, 정읍향제줄풍류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300012
영어공식명칭 Jeongeuphyangje-Julpungnyu in search of true Pungnyu culture
분야 문화·교육/문화·예술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시대 근대/근대,현대/현대
집필자 고광모

[정의]

전라북도 정읍 지역을 거점으로 전주·이리·구례 등 호남 지역에 광범위하게 영향을 준 현악 중심의 기악곡.

[개설]

향제풍류의 형성 시기는 최고의 민간 악보인 『금합자보(琴合字譜)』[1572년(선조 5)]에 만대엽의 거문고보가 전하는 점으로 미루어 적어도 선조 이전에 형성되었으리라 추정된다. 영산회상의 풍류가락은 『연대금보(延大琴譜)』[17세기 후반~18세기 초]에 처음 등장한다. 영산회상은 본래 조선 궁정의 악공들이 연주하던 음악이었는데, 선조 이전 무렵부터 중인층의 비전문 음악인들에 의하여 민간의 풍류로 연주되고 근대에 이르러 평민 출신의 풍류객에 의하여서도 연주되었다. 그리고 중인층이 풍류회를 조직하면서 율회의 레퍼토리를 가집과 악보로 남겼다.

조선 후기에 부유한 중인층과 사대부들의 즐기던 예술 행위로서의 향제풍류는 서울을 중심으로 전승되는 경제풍류와 대비되는 형태이다. 전북 지방 향제풍류는 영산회상을 주 악곡으로 연주하는 줄풍류와 삼현육각편성으로 연주하는 대풍류가 있는데 일반적으로 전북 지역에서 풍류라 하면 성악부가 빠진 현악 기악곡 영산회상으로 대표되는 줄풍류를 가리킨다. 대부분이 거문고를 중심으로 가야금, 해금, 세피리, 대금, 앙금, 단소, 장고 등의 악기로 구성되어 연주되면서 단잽이 편성을 원칙으로 하는데 거문고나 가야금의 음량이 약한 관계로 악기의 음량과 조화를 위하여 단소나 양금을 첨가하기도 하였다. 때로는 향피리 대신 세피리를 쓰고, 대금은 저음역과 중음역 중심으로 제한하는가 하면 해금과 장구는 가장자리로 이동시켜 공명(共鳴)을 약하게 하였다. 구성된 악기로 견주어 봐서 타악기, 관악기는 물론 춤까지로 확대된 전통 공연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호남의 이리·정읍·흥덕·부안·김제·옥구·강진·전주·목포 등지의 풍류방이 유명하였는데 당시 호남 지역 교통의 중심지였던 정읍의 역할이 컸다. 특히 정읍을 중심으로 호남 일대를 오가며 풍류를 전수하였던 풍류음악의 대가 전추산(全秋山)에 의하여 정읍향제 가락이 전남북의 제자들에게 이어졌는데, 이리향제줄풍류에 정읍의 초산율계에서 활동하던 현악기의 대가 금사 김용근과 관악기의 대가 전추산 등이 끼어 있었다는 것이 단적인 예이다. 정읍을 비롯한 흥덕, 부안 인근 지역에서 활발하였던 향제풍류가 이리와 구례를 아우르는 호남 지역에 광범위하게 전승되어 줄풍류의 전통문화를 견인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정읍향제줄풍류의 구성]

전북 향제풍류는 다스름·본영산·중영산·잔영산·가락더리·상현환입·잔도드리·하현환입·염불환입·타령·군악·계면가락도드리·양청도드리·우조가락도드리·풍류굿거리 등 14곡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북 향제풍류의 14곡은 본영산~중영산까지를 본풍류, 잔영산~군악까지의 8곡을 잔풍류, 계면환입~굿거리까지 4곡을 뒷풍류라 한다. 여기서 정읍을 중심으로 한 이리, 구례의 향제풍류가 서울의 경제풍류와 다른 점은 경제에 없는 다스름을 연주하고 잔도드리와 천년만세[계면환입·양청환입·우조환입]를 더하고 다시 호남 풍류에만 있는 굿거리를 맨 끝에 연주하는 것이다. 또한 정읍과 이리를 중심으로 전승되는 향제풍류는 음계 차이는 없지만 부분적으로 선율과 출현음의 음고에서 차이가 나고 거문고의 경우는 진성·퇴성·추성 등의 주법을 많이 쓰며 경제보다 간음이 추가되고 리듬이 세분되어 있다. 후대에는 여기에 다른 악곡들이 덧붙여지면서 다양하게 변주되고 있다.

풍류방에서 풍월을 읊는 시객, 서화를 하는 묵객, 음율을 하는 율객, 가곡을 부르는 과객들이 모두 향제줄풍류에 참여하면서 정읍의 풍류방은 시단(詩壇)과 가단(歌壇)의 확산과 혼합의 양상으로 조선 후기 예술의 최대 부흥기를 이루게 된다. 또한 풍류의 침체기도 인근 율계들을 포괄하면서 향제풍류의 전통을 지속시켰다. 이는 정읍에 거주하였던 전추산전추산의 제자 및 주변 인물의 활약에 의한 것이다. 이로써 정읍줄풍류가 호남 풍류문화의 토대를 이루는 데 밑거름이 된 것으로 보인다. 풍류적 기제(技題), 시(詩), 서(書), 화(畵), 악(樂) 그리고 아양정에서 풍류할 때 언제나 잽이가 참여한 것은 가무(歌舞)도 곁들였다는 것을 방증한다.

[풍류의 맥을 이어 온 정읍]

풍류는 ‘멋있는 일’, ‘예술적인 취향’을 의미하며 풍류에는 삶의 여유와 미적 감각 그리고 정서를 중요하게 여기는 문화적인 가치가 내재되어 있다. 그 기원은 인간의 역사와 함께하겠지만 기록에 의하면 신라 시대 향가와 가창이고 고려 시대에는 ‘풍류’가, 조선 시대에는 선비로서의 여유와 예술을 포함한 가곡과 악곡이 있다. 신라 시대에서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풍류의 의미는 약간의 변화가 있었고 근대에 이르러 평민 출신 풍류객이 참여하면서 형식의 다양한 변화가 더 일어난다. 그리고 이러한 풍류는 단순한 율객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비전문가들도 참여하여 고정된 형식이나 규격보다 시대적인 성향에 따라 자주 변하게 되었다. 따라서 향제줄풍류는 경제와 달리 가락이 고정되지 않고 전승 계보에 따라, 지역에 따라 재해석된 가락으로 변화하였다.

정읍의 줄풍류는 정읍에서 대를 이어 전승되어 온 전통예술로서, 그 기원은 불분명하지만 허창이라는 사람으로부터 정읍 지역 풍류의 전통은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후 전계문이 허창으로부터 풍류와 정가를 배워 많은 제자들에게 전함으로써 정읍 지역의 풍류와 정가의 전통을 수립하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일제 강점기에는 전북 지역 풍류방의 번성을 기반으로 익산의 벽두계가 있었고, 1910년 후반 고창 성내 3.9계가 1930년 초반까지 지속되다가 일제의 탄압으로 해산되었으며, 1935년대 고창 흥덕의 아양율계가 조직되어 활동하였다. 이러한 율회가 전북의 유명한 풍류객과 기생, 광대, 공인·악사들에 의하여 대규모로 치러졌는데, 해방 후까지 지속되다가 6·25전쟁으로 해산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아양정을 중심으로 한 음율계에 102명의 계원이 활동하였는데, 이 음율계는 송하연, 은성익, 오의균, 김기남, 김용근 등의 풍류객들로 구성되었다. 이후 풍부한 물산과 철도망 교통의 요지인 정읍 박문원 산정에서 많은 이들이 풍류를 배웠다.

6·25전쟁 이후 정읍의 아양율계는 해산되고 1954년 무렵에 초산율계로 조직된다. 전쟁의 피해로 단절된 향제풍류가 정읍을 기점으로 호남 지역에 다시 확산되기 시작하여 전주, 부안, 익산, 구례, 대전 등으로 파급되었다. 전계문전추산[용선]이 그 중심에 선 대표적 인물이다. 전계문은 대금의 대가로 독특한 연주 스타일로 혁신적인 음악을 창출하였고 뒤를 이은 전추산은 단소 산조로 유명하다. 전추산은 단소의 최고 명인으로 우리나라 향제풍류의 실질적인 개척자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다. 특히 전추산은 전주·구례·이리·전주 등지에서 풍류를 가르치고 연주 활동을 함께 하여 정읍 풍류의 맥을 이끌어 왔다. 전추산의 대표적인 제자로는 편재준, 나금철, 유종구 등이 있고 편재준의 제자로는 전라북도 무형문화재[지금의 전북특별자치도 무형유산] 대금 정악으로 지정된 바 있는 김환철이 있다. 구례향제풍류 무형유산 후보인 이기열은 나금철의 제자이며, 거문고 산조의 명인 김윤덕김용근의 제자였다. 이리 풍류의 황상규는 익산 출신으로 정읍에서 김용근에게 풍류와 가곡을 배워 정읍의 초산율계에 여러 차례 참가하였고, 이리향제줄풍류 보유자 강낙승 역시 한때 초산율계의 회원으로 활동하며 김용근에게 거문고를 배웠다. 이렇듯 정읍은 전계문·전추산·편재준 같은 풍류의 대가들이 활동하였고 풍류객을 후원하던 향유층을 기반으로 풍류가 성행하였다. 정읍 지역의 풍류객들은 아양계, 초산율계를 조직하여 풍류 활동을 전개하였고 그러한 전통이 현재 정읍정악원으로 이어지고 있다.

[정읍향제줄풍류를 이끈 명인들]

정읍을 주요 거점 지역으로 활동한 기악 명인으로는 전계문[대금, 정악, 양금, 가야금, 거문고 등의 명인], 전추산[단소 산조 창시자], 전생필[대금], 전기환[피리, 삼현육각의 대가]이 천안 전씨 무계 관련 명인으로 정읍 풍류방의 음악적 주체가 되었고, 김판순[피리, 가야금, 해금], 서용석[전북특별자치도 무형유산 대금산조 기예능보유자] 등 연주가 뛰어난 이들이 정읍 풍류방을 이끌면서 근대 전통문화의 중심에 서게 된다.

전주 재인청 소속 전계문을 중심으로 아양정[아양계]에서 시작한 정읍향제풍류전계문과 같은 집안[혹은 조카]이라 하는 전추산에게 전승되었는데 전추산은 단소, 대금, 퉁수, 피리, 가야금, 해금, 양금 등을 두루 연주하면서 단소 산조의 창시자로 굳건히 자리매김하였다. 전추산은 고창 흥덕, 정읍 고부, 태인 등으로 출생지가 추정되지만 정읍에 주 거처를 두고 살면서 정읍 지역 최초 조직 풍류계인 초산율계(楚山律契)의 향제풍류에 있어 음악적 지도자로서 전승과 보급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특히 단소의 신화적인 연주자로 알려져 있는 전추산은 한곳에 안주하지 않고 평생을 풍류객들과 어울렸는데, 그 과정에서 호남과 영남 일대에 수많은 제자들을 두게 되었다. 이러한 활동이 근대 역사에서 향제풍류가 정읍 풍류의 영향하에 움직이는 계기가 된다.

전추산은 1930년대 정읍의 대부호의 산정에 머물면서 풍류를 하였는데 이때 김용근, 신달용, 이기열, 나용주 등이 함께 풍류를 하였으며 제자를 양성하였다. 김무규에게 단소와 대금의 풍류를 가르쳤고 초산율계로 주로 활동하는 한편 이리 풍류의 율객으로 초청받아 진종하와 진양수에게 단소풍류를 가르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전추산의 가락을 온전히 계승한 사람은 많지 않고 구례의 김무규[1907~1994], 흥덕 후포 출신 편재준이 전추산의 가락 일부를 이었을 정도이다. 전추산의 연주는 3~4개 정도가 녹음으로 기록되어 맹인 편재준, 임길동에게 이어진 이리 풍류와 이순조, 권혁성으로 이어지는 구례 풍류에 전하고 있다.

전추산의 활동 옆에서 정읍 풍류의 빛을 발휘한 풍류객 김윤덕은 정읍에서 출생하여 정자선 문하에서 양금을, 오화동 문하에서 가야금을 사사하였고 1968년 중요무형문화재 가야금산조 및 병창의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정읍 북면 출신의 신달용은 전계문에게 대금을, 전추산에게 대금산조를 배웠고 풍류와 산조에 능하여 정읍의 초산율계 창립 회원으로 참여하였다.

[현대 정읍 지역 풍류문화를 이끄는 사람들]

초산율계는 우리나라 국악이 전반적으로 침체기를 맞아 지리멸렬해진 인근 율계 활동을 흡수하면서 향제풍류의 전통을 지속시킨 중요한 예이다. 초산율계는 정읍 풍류의 전통음악과 문화를 널리 알리고 보전하는 문화 단체로 결성되었다. 당시 참가한 이들은 김용근, 황상규, 정경태[거문고], 박주양, 나금철, 신갑, 박득붕, 강낙승[가야금], 전추산, 유종구[단소], 신달용, 오진석, 신갑, 박득붕, 김홍진, 이상백[양금, 가야금], 은희상, 나용주, 송기동[양금], 신장렬[피리], 이기하[가곡], 김관, 김진술 등이었다. 1954년 정읍의 초산율계는 아양율계를 기반으로 조직되어 1969년 잠시 해산되었다가 정읍정악원을 지어 소집하였고 1978년 재발족하여 김수, 진철호, 김문선[정읍풍류방 샘소리터 회장] 등 젊은이들이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정읍 지방 풍류의 전통은 김문선을 중심으로 1999년 샘깊은소리회가 정읍 풍류를 계승하였고, 2004년 정읍 달맞이골[월영마을]에 전용 공간인 샘소리터를 짓고 정읍의 풍류를 널리 알리고 있다.

현재 정읍 풍류는 아양계에서 그 후신인 초산음률회로 이어지고 있는데 현재 매월 둘째 주 일요일마다 삭회에 정칠환, 안완식, 나종민, 김진우, 최소영 등 23명 정도가 모여 한국 문화유산의 중요한 부분으로 남아 있도록 활동하고 있다. 아양계 역시 정읍 풍류의 진흥과 보전을 위해 헌신하는 또 다른 문화 단체로 맥을 이어 1998년 정읍 풍류의 전통음악과 춤을 보전하고 문화 교류와 이해 증진을 도모할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아양계는 음악 활동 외에도 정읍 풍류와 관련된 연구와 기록 활동을 하고 있다. 그 일환으로 음악의 역사와 문화적 맥락을 연구하고 보전하기 위하여 현장 작업과 전통 음악가 및 해당 분야 전문가들과 결합하여 일하고 있다. 향제줄풍류에 관한 연구는 당시 사회의 문화적 환경과 예술적인 가치들을 보존하고 우리의 문화유산을 풍성하게 재현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그 외 정읍의 풍류문화를 살펴보면, 정읍을 모체로 발생한 전통음악인 수제천은 ‘정읍줄풍류’와 더불어 조상의 사랑과 소원, 치유의 향유를 담고 있으며 소중히 전승하여야 할 지역의 문화유산이다. 또한 영모재는 정읍 풍류를 비롯한 국악을 보전하고 진흥에 중요한 역할을 하여 온 장소로 전라도의 문화적 정체성을 담고 있는 뜻깊은 의미를 지닌 곳이다. 풍류에는 음악적인 중요성 이외에도 다양한 문화적 전통과 역량이 담겨 있다. 끝으로 ‘정읍줄풍류’는 정읍을 기점으로 집약하여서 연주되었고 또 정읍을 중심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하였다는 점에 주의를 집중할 필요가 있다. 특히 전주·구례·이리·정읍 등지에서 풍류를 가르치고 연주 활동을 한 전추산의 궤적은 의미 확산의 분기점이 될 수 있다. 전추산이 직접 참여하였던 율회에서의 음악적 교류와 전추산에게서 풍류를 배운 율객들의 연주 활동이 호남 지역에 널리 전추산의 풍류가락을 전파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 명인은 각 지방 율계에 참가하여 지방의 풍류 발전에 공헌하며 율회의 사법으로 제자들을 양성하였으므로 그 연주 활동이 향제풍류에 미친 영향은 매우 크다고 본다. 그러나 1985년 구례향제줄풍류와 이리향제줄풍류가 국가무형문화재[국가무형유산]로 각각 지정된 반면 정읍의 줄풍류는 지정되지 못한 것에 아쉬움이 있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