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300207 |
---|---|
한자 | 眞興里 |
영어공식명칭 | Jinheung-ri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감곡면 진흥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진우 |
[정의]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감곡면에 속하는 법정리.
[명칭 유래]
진교리(眞橋里)의 진(眞) 자와 신흥리(新興里)의 흥(興) 자를 따서 진흥리(眞興里)라 하였다.
[형성 및 변천]
본래 태인군 은동면(銀洞面) 지역이었으며,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에 따라 산직촌(山直村), 대사리(大四里), 신흥리, 진교리, 점촌(店村)과 군내면(郡內面) 여속리(餘粟里) 각 일부를 병합하여 전라북도 정읍군 감곡면 진흥리로 개설되었다. 1995년 1월 1일 도농 통합 정책에 따라 정주시와 정읍군이 정읍시로 통합되면서 전라북도 정읍시 감곡면 진흥리로 개편되었다. 2024년 1월 18일 전북특별자치도 출범에 따라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감곡면 진흥리가 되었다.
[자연환경]
서쪽으로 백산(栢山), 동쪽으로 천애산(天涯山)이 솟아 있고, 진흥리는 두 산 사이의 낮은 구릉 지대에 넓게 자리하고 있다. 소제제, 산지제, 진흥제, 진농제, 가락제[진교방죽] 등 작은 저수지가 있다.
[현황]
2023년 5월 현재 진흥리의 면적은 4.91㎢이며, 인구는 250가구, 410명[남자 205명, 여자 205명]이다. 진흥리는 감곡면의 중앙부 하단에 있으며, 동쪽으로 대신리, 서쪽으로 신태인읍 백산리, 남쪽으로 태인면 박산리, 북쪽으로 방교리와 접하고 있다.
진흥리는 석점(石店)·진농(眞農)·진산(眞山)·진교(眞橋)·소제(蘇提)·산지(山芝)·녹촌(綠村)마을 등 7개 행정리로 이루어져 있다. 석점마을은 석정리와 점촌, 배씨촌을 합하여 한 마을을 이루었다. 석점마을에는 천주교가 일찍 전파되어 진흥공소[석점공소]가 자리하였다. 옹기 가마가 3개가 있어 1곳은 옹기, 2곳은 막사발을 구워 생산하였으나 천주교 전래 뒤 옹기만을 생산하였다고 한다. 6·25전쟁 중 수복 후 조성된 난민촌 가운데 3차로 조성된 농원과 4차로 조성된 농원을 각각 3차 농원, 4차 농원이라 하였는데, 다시 진흥리에 있는 농원이라는 의미를 담아 진흥농원(眞興農園)이라 하였다고 한다. ‘진농(眞農)’은 진흥농원을 줄인 마을 이름이다. 진흥농원 중에서 산이 많아서 붙인 마을 이름이 진산이다. 진교마을은 쇠향골 또는 사향골이라 하고 시앙터, 중쇠터라고도 하며, 밭농사를 주로 하는 진흥리 중심 지역이다. 진교마을은 조선 시대에 은기동면 소재지였다. 진교마을은 산지제에서 발원하여 진교마을 앞을 흘러 감곡천에 합류하는 쌍구름통내가 있으며, 쌍구름통내는 마을 남쪽의 논 진드리[진들, 긴들]와 원터골 북쪽의 창들을 일구는 농수원이 된다. 소제(蘇提)마을은 와우터라고 하였는데, 소[牛]가 소(蘇)로 바뀌었다. 소제마을에서 진교마을로 이어지는 제방이 있어 소와 제를 합쳐 ‘소제(蘇堤)’라 하였다고 한다. 산지마을은 과거 산직촌으로 천애산 줄기 끝에 자리하고 있다. 특용 작물을 많이 재배한다. 산지마을 옆으로 호남선 철길이 지나간다. 녹촌마을은 본래 산지마을에 속하였으나 1986년 9월 분리되었다.
진흥리의 문화유산으로 1905년(광무 9) 명정이 내리고 1915년 건립한 효열부 김해 김씨 정려가 있다. 열녀 광산 노씨 정려는 1929년 김창석(金昌碩)이 정려실기(旌閭實記)를 썼다. 김효(金孝) 할머니가 930평[약 3,074㎡]의 논을 마을에 기증하여 1984년도에 주민들이 진교마을 입구에 김해 김효 여사 추모비를 세우고 기일 제사를 지내고 있다. 진농마을에 고인돌 1기가 있고, 소제마을에는 원래 오방(五方)을 관장하는 선돌 5기가 있었으나 현재는 2기만 남아 있다. 진흥리의 도로로는 신태인읍 백산 북쪽으로 통하는 지방도 제736호가 있고, 백산감산로가 백산 남쪽으로 통한다. 백산감산로는 구계선(九溪線)과 같으며 신태인읍 구석리와 김제시 금산면 계월리를 있는 지름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