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 시대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300400
한자 三國 時代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시대 고대/삼국 시대/백제
집필자 김병남

[정의]

고구려·백제·신라의 세 나라가 병립하였던 시기 전북특별자치도 정읍 지역의 역사와 문화.

[개설]

삼국 시대(三國 時代)는 신라가 건국되는 기원전 57년부터 고구려가 멸망하는 668년까지이다.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지역은 삼국 시대 초기에는 삼한 중 마한에 속하였으며, 이후 백제에 속하게 된 지역으로, 엄격한 의미에서는 백제가 정읍 지역에 진출하면서부터 백제의 멸망까지를 삼국 시대로 설정하여야 하지만, 한국사에서의 삼국 시대는 신라의 건국에서부터 고구려의 멸망까지로 설정하고 있기 때문에 이에 따른다.

[백제의 정읍 진출]

백제는 온조왕이 기원전 18년 한강 유역에서 건국하였으며, 이후 마한의 영역을 점령하면서 주변으로 영역을 확장하여 나갔다. 『삼국사기』「백제본기」 기원전 6년(온조왕 13)의 기사에 따르면 백제는 마한에 도읍을 옮긴다는 것과 강역을 확정하여 통고하였다. 이때 남쪽은 웅천(熊川)으로 경계를 삼는다고 하였다. 웅천의 위치에 대하여 경기도 안성군 안성천으로 보는 견해와 공주의 금강으로 보는 견해 등이 있으나 현재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이후 백제의 남방 진출과 관련되어서는 기록이 없다가 비류왕 대에 와서 기록이 등장한다. 『삼국사기』「신라본기」 330년(흘해이사금 21) 조에 벽골지(碧骨池)[벽골제]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삼국유사』 왕력 제1에는 329년의 일로 기록되어 있다. 이때 등장하는 벽골지는 현재의 전북특별자치도 김제시 부량면 포교리에서 월승리에 걸쳐 있는 벽골제를 의미한다. 벽골지의 축조 주체에 대해서 당시 신라가 김제시 지역을 차지하였다고 보기 힘들기 때문에 백제의 기록이 「신라본기」에 잘못 편입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렇다면 330년(백제 비류왕 27) 벽골지를 축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1975년 발굴 조사를 하면서 제방 바닥에서 채취한 탄화된 식물을 시료로 한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에 따르면 대략 4세기 중엽에 축조되었다고 추정된다.

벽골제를 축조한 주체에 대하여서는 백제인들이 축조하였다고 보아 왔으나, 축조 기법이 마한 분구묘와 유사한 점을 들어 백제인이 아니라 마한인들이 축조하였다는 견해도 제시되고 있다. 마한인들이 벽골제를 축조하였다면 백제가 김제 지역을 차지하였다고 볼 수 없으나, 축조 주체를 백제인으로 보면 이때에 백제가 김제 지역을 차지하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백제에서 벽골제가 있는 김제시 지역을 차지하였다면 바로 인접하고 있는 정읍 지역으로도 백제가 진출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 외에도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백제가 정읍 지역으로 진출한 것은 4세기 중반으로 볼 수 있다.

백제는 정읍 지역을 차지하고, 행정 구역을 설치하였다. 즉, 백제에서는 현재의 정읍시 칠보면 지역에 대시산군(大尸山郡), 정읍 시내 지역에 정촌현(井村縣), 정읍시 신태인읍 지역에 빈굴현(賓屈縣), 고부면영원면 지역에 고사부리군(古沙夫里郡)을 설치하였다. 한편 백제 후기에는 고사부리군에 중방성(中方城)을 두었다.

[백제 유물과 유적]

백제에서 축조한 관방 유적으로는 시루봉산성, 상두산성, 평사리산성, 무성리산성, 오성리산성, 매정리산성, 백산리산성, 명금산성, 대산피토성, 내장동산성, 초산산성, 죽지리산성, 행단산성, 은선리토성, 금사동토성, 고부읍성, 두승산성 등이 알려져 있다. 그리고 정읍시 소성면 보화리에서 7세기 중엽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정읍 보화리 석조이불입상이 발견되었다. 불상의 본래 위치는 확인할 수 없으나, 석불이 발견된 장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제방 유적으로는 눌제가 있다. 눌제는 익산시의 황등제, 김제시의 벽골제와 함께 호남의 3호(湖)로 불리는 제방이다.

[백제의 부흥운동과 정읍]

660년 백제가 멸망한 이후 백제 유민들은 부안군을 중심으로 백제부흥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661년(태종무열왕 8) 봄 2월 백제군이 사비성을 공격하자 신라 태종무열왕은 이찬 품일(品日)을 대당장군(大幢將軍)으로 삼아 신라군을 구원하게 하였다. 3월 5일 품일은 휘하의 군사를 나누어서 두량윤성(豆良尹城) 남쪽에 진을 치게 하였으나 백제군의 공격으로 패하였다. 이후 신라군은 3월 12일 고사비성(古沙比城) 밖에 와서 주둔하고 두량윤성을 공격하였으나 한 달 엿새가 지나도록 이기지 못하고, 4월 19일 군사를 돌려 빈골양에 이르러 백제군과 싸웠으나 패하고, 각산(角山)을 거쳐 퇴각하였다. 이 과정에서 나오는 고사비성은 현재의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고부면에 있던 고사부리성을 의미하며, 빈골양은 백제의 행정 구역이었던 빈굴현(賓屈縣) 지역이다. 즉, 당시 신라군은 고부면영원면 지역에 주둔하고 두량윤성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퇴각하는 과정에서 신태인읍 지역에서 백제군과 싸워 패하고 신라의 영역으로 퇴각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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