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300394
한자 歷史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재영

[정의]

전북특별자치도 정읍 지역의 선사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역사.

[개설]

정읍은 선사 시대 고창에 이어 고인돌 문화의 중심지였다. 삼한 시대에는 현재의 정읍에 초산도비리국(楚山塗卑離國)이 있었고, 고부에 고사부리국(古沙夫里國)이 있었다. 삼국 시대 정읍은 정촌현(井村縣)이었고, 고부는 고사부리군(古沙夫里郡)이었다. 태인은 인의현(仁義縣)이었고, 현재의 칠보인 태산은 대시산군(大尸山郡)이었다. 후백제 시대에는 초산군이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정읍향교지』에도 한때 초산군이라 일컬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고려 시대에는 고부에 관찰사가 파견되었다. 이때 두승산성으로 치소를 옮긴 것으로 추정된다. 1914년 일제에 의하여 행정 구역이 통폐합되면서 고부와 태인을 병합하여 현재의 정읍시가 되었다.

[선사 시대]

정읍은 구석기와 신석기 시대의 유물과 유적이 출토되지 않은 지역으로 인식되어 왔으나 2002년 고부천에 해당하는 정읍시 영원면 성지마을 야산의 능선 자락에서 구석기 시대의 몸돌석기가 확인되었다. 정읍 지역에서 처음으로 확인된 구석기 시대의 유물이다. 정읍 지역 후기 구석기 시대의 문화상을 가늠할 수 있는 자료라고 할 수 있다. 관련 유구는 확인되지 않았다. 이로 보아 오래전부터 동진강을 터전으로 선조들이 생활하였음을 알 수 있다.

2020년 산내면 정읍 구절초 지방정원 조성 사업이 진행 중인 구절초 테마공원에서 구석기 시대 유물이 다량으로 출토되었다. 유물은 약 8000년 전 후기 구석기에서 신석기로 넘어가는 것으로 추정된다. 정읍에서 구석기 유물이 나오긴 하였지만 유적지가 발견된 것은 처음이었다. 출토된 유물은 약 1,000여 점이었다. 학계에서는 석기 제작에 쓰인 다듬잇돌[망칫돌]과 화덕 흔적이 발견된 점으로 보아 해당 부지가 구석기인들의 임시 공간이 아닌 거주 공간이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간 후기 구석기에서 신석기 시대로 변화되는 시기의 유적은 제주도 고산리 유적이 유일한 것이었다.

신석기 유적으로는 감곡면 유정리 옥신마을에서 간석기가 나와 정읍 지역 역사에서 구석기 시대에서 청동기 시대를 연결하는 중요한 성과물로 평가되었다. 청동기 시대 유적으로는 1969년 정읍 가정리 정호유구와 1985년 고부천 지류에 해당하는 갈선유적이 정읍 지역에서 최초로 확인된 청동기 시대 전기 주거지이다. 청동기 시대 중기에 해당하는 유적이 정읍천 지류에 해당하는 외장유적에서 발견되었다. 청동기 시대 대표적인 묘제인 고인돌[지석묘]은 1986년 지표 조사에서는 14개소에서 64기가 확인되었으며, 최근까지도 20개소에서 82기가 분포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으나, 2006년 『문화유적분포지도』 작성과 더불어 추가로 확인된 고인돌을 종합적으로 파악한 결과 정읍 지역에는 45개소에 177기가 분포하고 있다. 이와 같은 수치는 고창에 이어 전북특별자치도 지역에서는 두 번째로 많은 분포를 보이고 있어 고인돌 문화의 중심지를 이루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밖에 동진강 유역에서는 고인돌 외에도 독널무덤[항아리 무덤]이 상평동 유적에서 확인되었다.

[삼한 시대]

삼한은 마한, 진한, 변한의 소국 연맹체로 마한은 54개의 소국으로, 진한과 변한은 각각 12개의 소국으로 이루어졌다. 마한은 모두 10여 만호로 큰 나라는 만(萬)여 호, 작은 나라는 수천 호였다. 삼한 중 마한은 가장 강성한 나라였으며, 백제 또한 마한 연맹체에 속하여 마한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정읍 지역은 삼한 시대 54개의 국가 중 하나인 초산도비리국이었다는 설이 있는데 근거는 현재도 ‘초산’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고부 지역은 고사부리국이었다. 현재의 고창과 부안 지역 일부가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정읍과 달리 고부는 국명이 ‘구소국(狗素國)’이라는 주장이 일찍부터 제기되었다. 현재 고부 지역에 대한 마한국을 고비리국과 구소국으로 보는 견해가 양립하고 있으나, 고비리국과 백제의 고사부리국은 같은 의미를 가진 것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고비리’보다는 ‘구소국’이라는 국명이 타당하다는 주장이 제기된 것이다. 고부의 고대 지명은 『삼국사기』의 고사부리(古沙夫里), 고묘부리(古묘夫里), 고사주(古四州), 고사부촌(古沙夫村), 고사비성(古沙比城), 고사(古泗) 그리고 중국 측 기록인 『주서(周書)』에 중방 고사성(古沙城), 일본 측 기록인 『일본서기』의 고사읍(古四邑)이란 이름으로 나오고 있다. 따라서 고사(古沙)=고사(古四)=고사(古泗)라고 할 수 있다. 구소국의 ‘구소’와 ‘고사’가 같은 음을 가진 동일 지역의 다른 표기였다면 고부는 구소국으로 비정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태인은 현재 이에 비정되는 나라 이름을 찾지 못하였다.

[삼국 시대]

정읍은 원래 고부(古阜), 정읍(井邑), 태산(泰山), 인의(仁義)의 4개 군현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고부는 백제 때 고사부리군이었고, 정읍은 정촌현이었다. 태산은 대시산군이었고, 인의현은 백제 때 빈굴현(賓屈縣)이었다. 1409년(태종 9) 태산과 인의가 합쳐져 현재의 태인이 되었다. 고사부리군은 현재의 고부면영원면 일대에 해당하고, 정촌현은 현재의 정읍 시내·북면 서부·입암면 지역에 해당한다. 대시산군은 현재의 칠보면·북면 동부·산내면·산외면·옹동면·태인면 남부에 해당하며, 빈굴현은 태인면 북부·감곡면·신태인읍에 해당한다. 고사부리군의 고을 터는 고부면 고부리 성황산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사부리성 북문지 성토층에서 ‘상부상항(上部上巷)’이라는 인장와가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성의 집수정과 성벽 조사에서는 ‘본피관(本彼官)’이라는 이름의 명문기와가 발견되었다. 여기서 본피는 지명이 아닌 신라 6부 중의 하나인 본피부를 뜻하는 것으로 통일 신라 시대 지방 통치 제도와 연관시켜 해석하고 있다. 고사부리성은 백제 오방성 중의 하나로 정치·군사의 요충지였다. 백제는 도읍을 북방에 두고, 고사부리성을 남방 경영의 중심지로 삼았다. 백제는 고부의 중방 고사성을 중심으로 서남부 지방을 통할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사부리성을 중심으로 동진강의 발원지인 동부 산악 지역, 고사부리성을 포함한 동진강 중류 지역, 그리고 동진강의 하구를 포함한 서부 해안 지역 등 3개 영역으로 구분되어 성곽이 분포하고 있다. 즉 백제는 동서와 남북 라인의 중심에 성곽을 배치하여 중방성 권역을 효율적으로 통제하고자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인근 4개 시군에 분포하는 백제의 성곽 43개소 대비, 동진강 유역에만 34개소[점유율 79%]가 분포하여 백제 시대 동진강의 중요성을 엿볼 수 있다. 유적으로는 영원면 은선리 운학리 지사리 일대에 백제 시대 고분군이 분포하고 있으며, 소성면 보화리에 백제 시대 정읍 보화리 석조이불입상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통일 신라 시대(후백제)]

정읍은 삼국 시대 정촌현으로 불렸다. 757년(경덕왕 16) 정읍현으로 고쳤다. 이때 순수 우리말 지명이 중국식 한자로 바뀌게 되었다. 당시 정읍현이 아주 작은 고을이었기 때문에 이웃 태산군(太山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 나중에 초산군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성지(城址)가 남초산봉에 남아 있다. 후백제 시대의 정읍 역사로 전하는 것은 없다. 다만,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군명 조에 정촌현 다음에 초산이 명기되어 있는데 연혁조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지역에서는 초산을 후백제의 정읍의 명칭으로 추정하고 있다. 『정읍향교지』에도 한때 초산군이라 일컬었다는 기록이 있다. 초산은 후백제 시대 정읍의 명칭이었다는 촌노들 사이에 전하는 주장은 이러한 근거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연혁 조에 후백제의 초산을 기록하지 않은 것은 견훤을 반역으로 간주하는 왕조 사관의 편견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서기 660년 백제가 멸망하자 임존성의 흑치상지와 주류성의 복신과 도침이 백제부흥운동을 일으켰다. 현재 복신과 도침이 주로 활동하였던 고사비성과 주류성에 대하여 고사비성은 고사부리성으로, 주류성은 부안의 우금산성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백제 때 축조된 산성으로 볼 수 있는 구체적인 자료가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에 단정 짓기는 어렵다.

[고려 시대]

고사부리성이 백제에서 후백제까지 동진강 유역의 중심이었다면, 고려 시대에 들어서면서부터는 두승산(斗升山)이 주목받기 시작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이나 『영주지』, 『고부군읍지』 등에 고려 태조 왕건이 고부에 영주관찰사(瀛州觀察使)를 파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현재의 도지사급에 해당하는 관찰사를 고부에 파견하였다는 것은 바로 이때 치소가 옮겨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두승산성고부면 입석리 두승산에 있는 산성으로 전북특별자치도 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산성의 둘레는 약 5㎞에 이르는데 아직까지 산성으로 이러한 규모는 확인된 사례가 없다. 산성 내부에서는 백제 토기편이 발견되기도 하지만 대부분 고려 시대 도기편과 기와편이 산재하기 때문에 고려 시대에 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행정적인 측면만 고려한다면 치소성은 두승산보다 고사부리성이 더욱 효율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치소를 옮긴 것은 후백제의 잔존 세력 및 민심에 대한 효과적인 통제방편으로 일환이었을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고려는 후백제의 잔존 세력 및 잔존 세력들을 추종하는 백성을 산성 축조에 투입함으로써 통제력을 강화하려고 하였을 것이다.

[조선 시대]

조선 시대 정읍은 태산현과 인의현을 합한 태인현·정읍현·고부군으로 이루어졌다. 1895년(고종 32) 갑오개혁으로 정읍은 태인군·정읍군·고부군으로 행정 구역이 바뀌었다. 군사 제도도 정비되었다. 3군에 각각 여러 가지 군기들을 비치하였으며, 특히 입암산성(笠岩山城)은 군사적 요충지로 많은 군사들을 배치하고 각종 군기들을 비치하였다. 교통 시설도 정비되었다. 역(驛)으로는 현재의 입암면 천원리천원역, 태인면 거산리거산역, 영원면 운학리영원역 등이 있었다. 원(院)으로는 현재의 연지동의 연지원, 입암면 단곡리 왕심마을의 왕신원, 북면의 송덕원, 가전원, 옹동면 용호리 솥튼재의 정어원, 태인면 대각교의 태거원, 태인면 고천리의 왕륜원 및 광제원·공유원·율원·생근원 등이 있었다.

[근대]

1894년 1월 10일 고부에서 시작된 동학농민혁명은 반봉건, 반침략의 근대 민족 운동으로서 민중이 ‘역사 발전의 주체’라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 주었다. 농민군이 집강소(執綱所)를 통하여 농민 자치를 실현한 것은 바로 이러한 역사 발전의 주체로서 역할을 보여 준 것이다. 또한 반봉건의 사회 개혁을 지향하였으며 반침략과 반외세를 분명히 하였다는 의의가 있다.

뒤이어 구한말 민족교육의 구심점 역할을 하였던 곳이 바로 1903년 박만환(朴晩煥)이 세운 영주정사였다. 영주정사는 당시 호남 지역 구학문을 대표하는 곳이었다. 백정기를 비롯한 인촌 김성수, 근촌 백관수 등 당대 호남 지역 부호의 자제들이 교육 기관을 통하여 교유하고 인맥을 형성하였다. 이 밖에도 박만환은 고부군수 조병갑의 파직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을 뿐만 아니라 동학농민혁명 직전에는 재부임하는 조병갑의 축출 자금을 출연하기도 하였다. 이로써 동학농민혁명이 발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으로는 의친왕 이강의 중국 망명 자금을 내놓기도 하였다. 아들 박승규도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근대 학교인 승동학교(升東學校)를 설립하여 근대 교육을 실시하였다. 한편으로는 면암 최익현에게 자금을 지원하고 아나키스트 백정기의 항일 무장 투쟁을 돕기도 하였다.

1906년 면암 최익현이 주도하였던 정읍 무성서원의 태인의병[병오창의(丙午倡義)]은 상소 운동에서 무장투쟁으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국모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일어난 을미의병과 달리 국권 회복을 위하여 일어난 항일 의병이었다. 태인의병은 을사늑약 후 호남 지방에서는 최초로 일어난 항일 의병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최익현이 거의하여 여타 지역 의병 봉기에 큰 파급 효과를 가져왔다는 점에서도 의의가 있다.

1907년 국채보상운동의 경우 전북특별자치도에서 참가자 수와 의연금 액수가 가장 많은 곳이 정읍이었다. 정읍 지역 발기인 가운데 전현직 하급 관리들이 참여하고 있음이 주목된다. 정읍단연동맹회의 발기인인 박중현(朴仲炫)이 전의관이었고, 박기철(朴箕哲)이 전문안 출신이었다. 중추원전의관 박중현은 동학농민혁명과 독립의군부에도 참가하였으며. 진사 박기철은 장명리에 사립 초남학교(楚南學校)를 설립하였다. 모두 장명동에 살던 태안 박씨들이었다. 시장에서는 상인들이 상점별로 많은 의연을 하였다.

1919년 2·8독립선언, 3·1운동, 한국유림단독립운동 파리장서사건 등은 모두 정읍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2·8독립선언에 백봉 나용균(羅容均)이 배후에서 거사 자금을 조달하는 데 주된 역할을 하였고, 3·1운동에서는 박준승(朴準承)[1865~1927]이 민족 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서명하였다. 파리장서에는 면암학파인 김양수(金陽洙)가 서명하였으며, 보천교에서는 5만 원의 군자금을 상하이임시정부에 전달하였다.

1920년 8월 정읍노동공제회에서는 전국 최초로 ‘소작인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소비조합 운동’을 병행하였다. 1925년 4월 태인노농회에서는 ‘소작권 이동 반대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25년 10월 화호노동친목회에서는 ‘소작료 인하 운동’을 전개하였다. 농민 운동의 경우, 1920년대 전반에는 한국인 지주를 대상으로 소작권 이동 반대 운동을 전개하고, 후반에는 일본인 지주를 대상으로 한 소작쟁의를 전개하였다. 1927년 4월 신태인읍 화호리에 있는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일본인 이민촌에서 소작쟁의가 있었고, 구마모토[웅본]농장에서도 1930년대에 소작쟁의가 4차례나 발생하였다. 당시 구마모토의 소유지는 정읍을 비롯한 김제, 옥구 등지의 5개 군 26개 면에 걸쳐 있었다. 구마모토는 토지 소유 전국 7위에 전북특별자치도에서는 동양척식주식회사 다음으로 많은 토지를 가지고 있었다. 구마모토 농장은 일제 강점기 농업 경영의 선진성과 수탈성이 가장 강하였다. 특히 증산 목표치를 미리 정한 후에 인상된 소작료를 징수하는 악랄한 방식을 취하였다. 농민들은 소작료 불납 동맹을 결성하여 대규모 투쟁을 벌였다. 그럼에도 화호지장 쟁의는 1937년까지 해결되지 않았다. 구마모토 농장의 사업장이 많았음에도 유독 화호에서 대규모 소작쟁의가 장기간 지속된 이유는 신태인 지역의 경우 일찍부터 각종 사상 단체와 연결된 농민 운동, 노동 운동 단체가 활동하여 왔기 때문이다.

한편, 1926년 3월경에는 이평농조가 조직되었다. 1928년 4월에는 산외면에 합법농조가 조직되었다. 이어서 전라북도 정읍군 용북면 삼천리[현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신태인읍 신태인리]에도 소작쟁의 과정에서 농조가 조직되어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비록, 군단위의 통일된 조직을 건설하지는 못하였으나 정읍 지역의 농조 운동은 전북의 다른 군에 비하여 활발한 편이었다. 1931년 11월 초 정읍·이평·산외·감곡·정토·용북 지역 활동가 30여 명은 ‘독서회 및 적농 조직 혐의’로 대거 검거되었으며, 이로써 정읍 지역 합법 농조 운동은 소멸되었다.

백정들의 신분 차별 철폐를 위한 형평운동(衡平運動)도 전개되었다. 정읍 형평분사는 전북에서 네 번째로 창립되었다. 하지만 백정들의 경제 활동에 관한 내용이 주로 토의되었을 뿐 인권 운동에 대한 내용이 거의 다루어지지 않았다. 형평운동의 1차 목적이 백정들에 대한 차별 대우 철폐임을 생각할 때 이는 달리 해석되어야 할 부분이다. 이것은 아마도 백정들의 직업 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이다. 특히 가난을 면치 못하였던 곳이 호남 지역 백정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차별 철폐를 위한 인권 운동보다 경제 투쟁이 우선시되었을 것이다. 이는 운동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활동 경비를 마련하기 위하여서라도 필요한 투쟁이었다.

1926년 6·10만세운동을 주도한 인물이 바로 산외 출신 이동환(李東煥)이었다. 6·10만세운동은 민족주의계와 사회주의 계열이 통합되어 신간회 결성의 결정적 계기로 작용함으로써 민족 유일당 운동의 신호탄이 되었다는 데 의의가 있다. 1927년 3월 25일 공판이 열렸다. 1심에서 검사가 “한강이 역류할지언정 조선 독립은 불가능하다”라고 말하자 이동환은 “한국이 당장에 독립은 안 된다 하더라도 우리 민족에게 민족정신을 앙양하고 독립사상을 고취하고자 하였다”라고 당당히 말하였다. 식민 통치의 상징인 총독부를 폭파하고 일본인들을 폭살하고자 하였던 이동환의 거사는 당시로서는 실행 가능성이 지극히 낮은 것이었다. 하지만, 실행 여부를 떠나 그 같은 발언이나 계획은 학생 운동에서 전례를 찾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일제 식민 통치하의 우리 민족의 현실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더욱 놀라운 일이다.

1927년 신간회 정읍지회는 함경북도 나남에 이어 전국에서 두 번째로 조직되었다. 호남 최초의 목사이자 형평운동의 고문으로 활동하였던 목사 최중진(崔重珍)과 민족주의자 이익겸(李益謙) 등이 관여하였지만 당대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실천적인 면에서는 미흡한 점이 많았다.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 당시에는 정읍농업학교에서 ‘동맹휴학 사건’이 있었고, 심지어 초등학교에서조차 조선의 독립을 염원하는 낙서를 하였다 하여 해당 학교장과 어린 학생들이 문초를 당하는 고통을 겪기도 하였다.

독립운동의 경우,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로 돌아갔으나 백정기의 ‘육삼정(六三亭) 의거’ 또한 주목할 만하다. 백정기는 이봉창, 윤봉길과 함께 3의사로 불리며 이준, 안중근, 이봉창, 윤봉길과 함께 5열사로 불리기도 한다. 육삼정 의거는 의열단원 김익상의 황푸탄 의거[1923],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紅口] 공원 의거[1932]와 더불어 중국 상하이에서 벌어진 ‘3대 의거’로 꼽기도 한다. 백정기의 유해가 현재 효창공원에 안장되어 있다. 백정기와 같이 중국에서 항일 운동을 전개하였던 김제 출신 정화암의 회고록에는 1932년 윤봉길의 상하이 훙커우 공원 의거와 별도로 독자적인 투탄 계획을 세운 바 있으나, 입장권을 구하지 못하여 실패한 것으로 전하고 있다. 1946년 7월 6일 이봉창·윤봉길·백정기 3의사의 장례가 대한민국 국민장으로 치러졌다. 광복 이후 최초의 국민장이었다. 1963년에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종교적으로는 동학의 이념을 계승한 강일순의 증산종교운동이 있었다. 이 증산 사상을 이은 것이 바로 차월곡[본명 차경석]의 보천교였다. 차월곡의 아버지 차치구는 정읍접주로 전봉준과 함께 동학농민혁명의 전 과정에 참여하였던 지도자였으며, 혁명 기간에 반드시 아들인 경석을 데리고 다녔다. 그러니 차월곡은 동학의 후예나 다름없는 셈이었다. 따라서 일제 강점기 보천교에서 전개한 민족 운동은 뿌리가 동학에 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보천교에서 상하이임시정부에 나용균을 통하여 5만 원을 전달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1922년 세계약소민족회의에 참가하는 우리 민족 대표들에게 1만 원의 여비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특기할 만한 사실은 김좌진에게 5만 원의 군자금을 제공하여 무장대의 편성을 가능케 하였다는 점이다. 이로써 김좌진 부대의 무장 투쟁 활동이 가능하여졌다는 것은 의의가 크다.

[현대]

광복 이후 정읍에서 있었던 특기할 만한 사실은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을 처음으로 공론화한 이승만의 정읍 발언과 백범 김구의 태인 방문이라 할 수 있다. 정치적 견해가 다른 두 민족 지도자가 시차를 두고 특정 지역을 방문, 중대한 발언을 한 것이다.

1. 이승만의 정읍 발언

1946년 6월 3일 이승만의 정읍 발언정읍동초등학교에서 있었다. 이승만의 정읍 발언은 1946년 6월 3일 정읍에서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을 공식적으로 언급한 이승만의 발언을 말한다. 이 같은 발언의 배경은 우리 의사와 무관하게 강대국들이 한반도의 신탁 통치를 결정하였기 때문이다. 1945년 12월 16일부터 25일까지 모스크바에서 열린 미·영·소의 3개국 외상회의에서 한반도를 강대국에 의한 5년 간의 신탁 통치를 실시할 것을 결정한 것이다.

2. 신탁 통치 반대 운동과 찬탁 운동

결의안 중 신탁 통치 조항은 사실 미국이 제안한 것이었으나 국내는 소련의 제안으로 왜곡되어 보도되었다. 단순 오보인지, 미국의 의도인지는 모르나 이로써 반소운동, 반공운동에 이용되었다. 당시 국제 사회는 한반도는 자치 능력이 없다고 판단하였으나, 우리는 자치를 해보지도 않고 탁치를 하려는 것은 민족적 자존과 감정을 상하게 하는 일이라며 적극 반대하였다. 또 다수의 민중은 신탁 통치는 일본의 식민 통치와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였다. 지배국이 1개국에서 다수의 나라로 바뀌었을 뿐이라고 생각하였다. 이 문제를 두고 좌익 중심의 찬탁운동과 우익 중심의 반탁운동이 극심하게 되자 이승만은 1946년 6월 3일, 전국 각지를 순회하는 도중 정읍동초등학교에서 다음과 같은 발언을 하였다.

“이제 우리는 무기 휴회된 미소공동위원회가 재개될 기색도 보이지 않으며, 통일 정부를 고대하나 여의케 되지 않으니, 우리는 남방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38 이북에서 소련을 철퇴하도록 세계 공론에 호소하여야 될 것이다.”

이승만은 정읍 발언 이전에 남선 지방을 순방 중에 있었으나 일정에 차질이 생겨 서울로 올라갔다가 발언 전날인 6월 2일 정읍에 도착하여 하룻밤을 보낸 것이 일간지에서 확인된다. 이승만이 숙박한 곳은 현재 노인 복지 시설로 사용되고 있는 이현옥의 소유 저택[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장명동]이라는 주장이 있는 반면에 근처 한상진 소유의 기와집이었다는 주장으로 엇갈리고 있다. 이현옥 소유의 저택은 구 한일여관으로 영화 「장군의 아들」 촬영지로 알려져 있다. 최근에 원래 숙박 장소는 구 한일여관 자리인 이현옥의 저택으로 정하였으나, 좌익과 우익의 대립이 심각한 상황에서 예기치 못한 불상사를 막기 위하여 밤중에 숙소를 근처 가까운 한상진 소유의 집으로 옮겼다고 하는 주장이 있다. 정치 지도자의 일정이 세세히 노출되었을 때의 위험을 고려한다면 수긍이 간다. 정읍 발언 이후, 이승만은 남한 단독 정부 수립에 본격적으로 나섰고, 12월부터 1947년 4월까지 미국으로 건너가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촉구하는 외교 활동을 벌이고 돌아왔다.

3. 이승만의 정읍 발언을 어떻게 볼 것인가

이승만의 정읍 발언은 미군정을 종식시킨다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으나, 통일 정부가 아닌 남한만의 정부 수립이라는 부정적인 측면이 있었다. 하지만 미국에 편승하여 남한에 단독 정부를 세우고, 이를 토대로 북한을 통일[북진 통일]하려는 2단계 전략의 일환이었을 것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 일부 연구자들은 정읍 발언이 분단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고 보고 있다. “좌우 합작 노력이 한창 수반되던 중 38선 이남에 단독 정부를 수립하여야 된다는 주장을 이승만이 처음으로 공론화하였다”며 “이승만은 분단 책임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에 반하여 한편에서는 1946년 2월 이미 북한 지역에 정부에 해당하는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가 성립되었기 때문에 정읍 발언은 분단과 무관하다고 보기도 한다.

4. 왜 ‘정읍’인가

이승만은 중차대한 발언을 서울도 아닌 왜 정읍에서 하였을까? 순회 도중 우발적으로 하였다고 볼 수도 있으나 사전에 치밀하게 기획된 발언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왜 정읍인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정확한 의도를 규명하지 못하고 있다. 아무리 기록이 없다 하여도 아무런 구체적인 정황에 근거하지 않은 채 정읍이 동학농민혁명의 발상지일 뿐만 아니라 항일 애국 운동이 일어난 역사적인 장소라는 점이 고려되었을 것이라는 막연한 주장은 납득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동학농민혁명은 당시 ‘동학당의 난’으로 평가되었기 때문에 그 발상지 또는 민주화를 상징한다는 이유로 정읍을 고려하였을 것이란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렵기 때문이다. 또 정읍을 항일 운동을 상징하는 대표 지역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따르기 때문이다. 의병도 마찬가지다. 전북특별자치도에서 가장 많은 의병이 있었던 곳은 순창이 264명으로 가장 많았고, 정읍은 207명으로 그 다음이었다. 그것도 고부와 태인을 포함한 숫자이다.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 이전의 3군으로 분류한다면 숫자는 현저히 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정읍은 고창과 부안을 아우르는 전북특별자치도의 서남부 지역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정읍을 중심으로 한 주변 지역에서 대거 군중 동원이 가능할 것이라는 점이 참작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승만은 6월 3일 정읍 발언이 끝나자 곧바로 전주를 거쳐 군산으로 이동한 것으로 봐도 그렇다. 1943년에 조사한 『조선총독부 통계연보』[제39권]에 따르면 당시 정읍 인구는 19만 6634명이었다. 따라서 3년 뒤인 1946년에는 20만 명을 상회하는 인구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5. “내가 정읍에 많은 빚을 졌다”라고 한 백범 김구의 발언

이승만의 정읍 발언 이후인 1948년 2월 10일 김구는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이라는 글에서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 38도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위하여 단독 정부를 세우는 일에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라고 하였다. 광복 이후 백범은 태인에서 3·1운동을 주도하였던 김부곤(金富坤)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으면서 “내가 정읍에 많은 빚을 졌다”라는 이야기를 하였는데, 그 해석에 많은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대체로 상하이임시정부에 독립운동 자금을 보천교에서 조달한 사실이 밝혀진 만큼 보천교를 의식한 발언으로 해석하고 있다. 정읍은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과 독립운동 자금 지원의 중심지였다는 사실이 작용하였을 것이다. 이는 상하이임시정부만이 아는 비밀이었을 수밖에 없다. 정읍과 태인, 보천교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한 사례를 한정된 지면에 일일이 제시할 수는 없으나 대체로 시가 200억 원이 넘는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민족 종교 보천교(普天敎)에서 5만 원의 독립운동 자금을 상하이임시정부에 조달하였다는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임정에서는 수립 초기 인도인을 고용하여 수위로 세웠으나 임시정부 청사 집세 30원과 20원도 되지 않는 고용인 월급을 주지 못하여 번번이 소송당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는 국내뿐만 아니라 하와이에서조차 독립운동 자금 조달이 원활하지 못하였다는 반증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5만 원은 임시정부의 회생 자금으로 충분하였을 것이다.

6. 광복 후 정읍 지역 좌우익의 대립

6·25전쟁 당시 정읍은 좌우 대립이 심각하여 민심이 아주 흉흉하였다.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공화국이라 할 정도로 빨치산들의 세력이 만만치 않은 곳이었다. 특히 내장산 아랫마을 월영의 솔티숲빨치산 본거지였다. 1950년 8월 5일 태인에서는 북한군의 만행으로 도래미산에서 벌어진 대한청년단 정읍군 태인면 간부 단원 11명이 전사하였다. 태인청년단은 광복 이후 혼란한 국내 정치와 사회 질서를 바로잡기 위하여 청년들이 결사한 민간 조직 단체였다. 국립경찰이 조직되고 나서도 민보단의 역할을 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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