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3004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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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統一 新羅 時代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
시대 |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 |
집필자 | 김병남 |
[정의]
신라의 삼국 통일 이후부터 고려 건국 이전까지 전북특별자치도 정읍 지역의 역사.
[개설]
통일 신라 시대는 남북국 시대라고도 한다. 1990년대까지는 신라의 삼국 통일 이후를 통일 신라 시대라고 하였으나, 통일 신라 시대라고 하면 발해를 우리의 역사에서 배제하게 된다는 논의가 있어 남북국 시대로 바꾸어 부르게 되었다. 시기에 대한 논의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으나, 여기에서는 고구려가 멸망하는 668년부터 후백제가 멸망하는 936년까지의 시기로 상정하였다. 660년 신라와 당(唐)의 연합군이 백제를 멸망시키고, 백제 지역에서는 3년 동안 부흥 운동이 벌어졌다. 부흥 운동 과정에 정읍 지역은 백제 부흥군의 영역에 포함되어 있었다. 663년 백제 부흥군이 무너지고 난 이후 당에서는 과거의 백제 지역에 5도독부를 설치하고 통치하였다. 668년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 신라와 당은 전쟁을 벌인다. 670년 3월 신라의 설오유(薛烏儒)와 고구려 부흥 세력의 고연무(高延武)가 지휘하는 연합군 2만 명이 전격적으로 압록강을 건너 요동의 오골성을 선제공격하면서 본격적인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 신라는 나당 전쟁 초기 주도권을 가졌다. 북쪽에서 시간을 버는 동안 신라는 670년 7월 과거 백제 지역에 대하여 공격을 시작하였다. 신라는 671년 과거 백제의 마지막 수도였던 현재의 충청남도 부여군에 소부리주를 설치하여 백제 영토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후 676년 11월 신라군은 바다를 건너 철수하려는 당군을 소부리주의 기벌포에서 공격하여 승리하였다. 기벌포 전투를 끝으로 당나라는 웅진도독부도 요동으로 철수하면서 과거 백제 지역은 완전히 신라의 영토로 편제되었다. 이때 정읍 지역도 신라의 영토에 편입되었다.
[행정구역 개편과 명칭 변경]
신라는 685년(신문왕 5) 지방 제도를 개혁하여 5소경(小京)과 9주를 설치하였다. 전북특별자치도 지역에는 남원경(南原京)[현 남원시]과 전주(全州)[현 전주시]를 설치하였다. 이때 전주에는 10군 31현이 소속되었다. 정읍 지역에 해당하는 지역은 대시산군(大尸山郡), 고사부리군(古沙夫里郡), 정촌현(井村縣), 빈굴현(賓屈縣)이 포함된다. 이후 757년(경덕왕 16) 12월 군현의 명칭을 중국식으로 바꾸었다. 즉 백제 때의 대시산군은 대산군(大山郡)으로 바뀌었으며, 정촌현은 정읍현(井邑縣)으로, 빈굴현은 빈성현(斌城縣)으로, 고사부리군은 고부군(古阜郡)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대산군은 고려 시대에 태산군(泰山郡)으로 바뀌었다. 치소는 현재의 정읍시 칠보면에 있었다. 정읍현은 이후 조선 시대까지 정읍현으로 불렸으며, 치소는 현재의 정읍시 지역이다. 빈성현은 고려 시대 인의현(仁義縣)으로 바뀌었으며, 치소는 현재의 정읍시 신태인읍 백산리 지역이다. 고부군은 이후 조선 시대까지 고부군으로 불렸으며, 치소는 현재의 정읍시 고부면 지역이다.
[최치원과 대산군]
최치원은 857년 출생하여 12살 때인 868년(경문왕 8) 당나라에 유학을 떠나 18세가 되던 874년 당나라 빈공과(賓貢科)에 급제하였다. 23세인 879년 고변(高騈)의 문객이 되었으며, 880년 황소의 난 토벌을 고변(高騈)이 맡게 되자 최치원도 참전하였다. 이때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지었다. 이후 884년 당나라를 방문한 친척 최서원(崔棲遠)[또는 崔栖遠]을 통해서 집안 사정 등을 듣고 귀국하기로 결정하였다. 날씨 때문에 산둥반도 등주에서 겨울을 보내고, 885년(헌강왕 11) 당 희종이 신라 왕에게 내리는 국서를 가지고 귀국하였다. 최치원은 헌강왕의 신임을 받았으나, 헌강왕이 886년 7월 사망하고, 진성여왕이 즉위하였다. 이때 최치원은 자청하여 외직으로 나아가 대산군(大山郡)의 태수가 되었다. 이후 893년(진성여왕 7) 최치원은 부성군(富城郡)[현 충청남도 서산시]의 태수로 있었다. 최치원이 대산군태수가 된 것이 언제이며, 언제 그만두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887년 진성여왕이 즉위한 이후 893년 이전 대산군의 태수를 역임하였다고 추정된다. 최치원이 대산군태수로 있으면서 어떤 일을 하였는지도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최치원이 대산군태수로 있으면서 대산군 지역의 학문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정읍 피향정(披香亭)을 건립하고, 유상대(流觴臺)에서 노닐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후 고려 시대에 최치원과 관련된 유상대 위에 태산사(泰山祠)를 지어 최치원의 덕행과 학문을 추모하였다. 태산사는 1484년(성종 15) 정극인(丁克仁)이 세운 향학당(鄕學堂)이 있던 현재의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로 이전하였다가 정읍 무성서원으로 발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