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3004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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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泰仁縣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 |
지역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태인면|신태인읍|감곡면|옹동면|칠보면|산내면|산외면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이동희 |
[정의]
조선 시대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태인면, 신태인읍, 감곡면, 옹동면, 칠보면, 산내면, 산외면 지역에 있던 지방 행정 구역.
[제정 경위 및 목적]
태산현(泰山縣)은 백제 시대 대시산(大尸山)으로 통일 신라 경덕왕 때 태산(太山)으로 개칭하였으며, 고려 때 고부군의 속현이었다가 감무(監務)가 파견되었다. 태산의 치소는 지금의 칠보면 시산리(詩山里)에 있었다. 조선 시대에 시산리·무성리 일원을 옛 치소가 있었던 곳이라고 하여 고현내면(古縣內面)이라고 칭하였다.
인의현(仁義縣)은 백제 때 빈굴양(賓窟壤)이었는데, 통일 신라 때 무성(武城)으로 고쳐 태산군의 영현이 되었다. 고려 건국 후 940년(태조 23) 인의로 바뀌어 고부군의 속현이 되었다가 태산현의 감무가 인의현의 감무를 겸하였으며 1019년(현종 10) 감무를 따로 파견하였다. 인의현의 치소는 지금의 신태인읍 백산리(栢山里)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건국 후 그간의 사회경제적 발전과 새 질서 창출을 위하여 군현 간의 대대적인 통폐합을 단행하면서, 1409년(태종 9)에 태산현과 인의현을 통합하여 태인현(泰仁縣)이라고 하였다. 고을 수령(守令)으로 종6품 현감을 임용하였으며, 관아가 있는 치소(治所)는 거산역(居山驛)으로 하였다가 거리상 불편하여 양쪽 지역에서 왕래가 편리한 정읍시 태인면 태성리, 지금의 태인초등학교로 옮겼다. 군사는 전주진관(全州鎭官)에 속하였다.
[내용]
태인현은 주로 음관(蔭官) 현감이 임용되는 읍이었다. 영조 대 『여지도서(輿地圖書)』에 기록된 태인현의 관아 조직은 현감[종6품], 향청의 좌수 1명과 별감 2명, 군관 30명, 아전 49명, 지인(知印) 32명, 사령 26명, 관노 30명, 관비 27명이었다. 현감의 집무처 태인동헌은 중종 때 태인현감 신잠이 건립하였으며, 동헌의 편액은 맑고 편안하게 다스린다는 의미의 ‘청령헌(淸寜軒)‘이다. 현재 태인동헌은 원형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으며 전북특별자치도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태인현의 군사 편제는 진관체제에서 전주진관에 속하였고, 태인현감은 절제도위(節制都尉)를 겸하였다. 전라도는 좌도와 우도로 구분되었는데, 태인현은 고부군·태인현과 함께 전라우도에 속하였다. 역원(驛院)은 거산역(居山驛)[현 정읍시 태인면 거산리] 1개 역과, 정어원(鼎魚院)·태거원(太居院)·왕륜원(王輪院) 3개 원이 있었다.
1790년대 『호남읍지』에 수록된 태인현의 호수는 7,854호이며, 인구는 3만 1280명[남자 1만 3604명, 여자 1만 7676명]이다. 태인현의 전답은 총 8,853결 69부 6속이며, 이 중에 논은 4,684결 88부 7속, 밭은 4,168결 80부 9속이다. 화전(火田)이 2결 7부 5속이다. 16개 면으로 편제되었다.
[변천]
1895년 8도제가 혁파되고 23부제로 개편되면서 군현의 명칭이 군으로 통일되어 태인군이 되어 고부군·정읍군과 함께 전주부에 편제되었다. 1896년 23부제가 혁파되고 다시 13도제로 개편되면서 태인군은 고부군·정읍군과 함께 전라북도에 편제되었다. 1914년 일제에 의하여 행정 구역이 개편되면서 태인현은 정읍군에 통합되었다. 현 정읍시에서 옛 태인현 영역은 태인면, 신태인읍(新泰仁邑), 감곡면(甘谷面), 옹동면(瓮東面), 칠보면(七寶面), 산내면(山內面), 산외면(山外面) 등 7개 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