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3004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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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己亥農民蜂起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조광환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899년 4월 1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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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결 시기/일시 | 1899년 4월 23일![]() |
발생|시작 장소 | 기해농민봉기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입암면 단곡리 왕심마을![]() |
종결 장소 | 난산 전투지 - 전북특별자치도 고창군 부안면 중흥리 알뫼장터 |
성격 | 농민 항쟁 |
관련 인물/단체 | 최익서|최영두|홍계관 |
[정의]
1899년 4월 18일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입암면 단곡리 왕심마을에서 동학농민군들 중심으로 형성된 농민 봉기.
[개설]
1894년(고종 31)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다 살아남은 손화중포와 김개남포에 속한 농민군들은 제2의 동학농민혁명을 계획하였다. 농민군들은 계획을 실행하기 위하여 북접 교단의 지원을 받고자 동학의 지역 조직인 포를 설치할 수 있도록 허락을 요구하여 조직을 확대하고자 하였다가 여의치 않게 되었다. 그러자 계획을 바꿔 말목장터에서 개최된 영학당 집회를 통하여 동지들을 규합하여 영학계를 조직하고 1894년 동학농민혁명 때 못다 이룬 사회개혁을 추진하고자 1899년 4월 18일[음력] 정읍현 입암면 왕심리[현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입암면 단곡리 왕심마을]에서 기해농민봉기를 일으켰다.
[역사적 배경]
동학농민혁명 이후 조선은 정부와 보수 유림, 농민 등 삼자 사이에는 심각한 갈등이 후유증으로 남게 되었다. 정부는 농민군의 재봉기를 막기 위하여 잔여 농민군들을 색출하거나 토벌하는 동시에 작통제(作統制)를 통하여 통제와 감시에 주력하는 동시에 신분제 철폐 등 동학농민혁명의 원인이 되었던 사회경제적인 모순을 개혁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였다. 보수 유림들은 곳곳에서 동학농민혁명 때 입었던 피해에 대한 복수를 자행하였고 그러한 과정에서 농민들은 수많은 살육과 약탈을 당하였다. 또 보수 유림들은 향약을 통하여 기존의 향촌 질서를 유지하려 하였고 이러한 정부의 개화 정책에 대해 반발도 컸다.
한편, 전쟁에서 패배한 동학농민군 중 일부는 친일로 돌아서는 경우도 있었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향을 떠나 신분을 감추고 숨어 지내면서 사회 변화의 추이를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부의 개혁이 일제에 의존하여 이루어졌으며 게다가 동학농민혁명의 원인인 사회 경제적 불평등을 해결하기보다는 농민층의 재봉기나 동요를 힘으로 억누르며 막는 데 집중되자 반외세의 성향이 강한 농민들은 새로운 길을 모색하게 되었다. 사회 변혁과 일제의 침략에 맞서기 위하여 민중들을 조직하였고, 그러한 조직들에는 동학당(東學黨)·영학당(英學黨)·남학당(南學黨)·서학당(西學黨)·화적당(火賊黨)·활빈당(活貧黨) 등이 있었다. 그 중 속칭 영학당사건으로 알려진 1898년 흥덕에서 일어난 무술농민봉기(戊戌農民蜂起)와 1899년 정읍에서 일어난 기해농민봉기(己亥農民蜂起)는 중심 인물들이 모두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으며 동학농민군이 내걸었던 보국안민과 외세 배격을 외치고 일어선 제2의 동학농민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1898년 11월 15일[양력 12월 27]부터 18일[양력 12월 30일]까지 무술농민봉기가 전개되었다. 흥덕군수 임용현(林鏞炫)의 탐학이 원인이었다. 흥덕의 영학당 두령 이화삼은 1898년 11월 15일 저녁 300여 명의 농민을 이끌고 흥덕관아를 습격하였다. 흥덕관아를 점령한 12월 30일 이화삼의 주도로 만민공동회를 모방한 민회를 개최하였다. 3차에 걸친 논의 끝에 군수를 흥덕군 경계 밖으로 몰아냈다. 그러나 이내 후회한 이화삼은 군수를 다시 귀환키로 마음먹고 농민군을 설득하였다. 이에 농민군은 동요하였다. 광주관찰부(光州觀察府)에서는 11월 18일 농민 봉기를 진압하고자 순검대(巡檢隊)를 파견하였으며, 이에 힘을 얻은 임용현은 각 면의 훈임과 이서들을 데리고 반격에 나섰다. 결국, 무술농민봉기는 광주에서 파견된 관군에 의하여 진압되었고 이화삼 등 관련 인물은 체포되었다.
[경과]
무술농민봉기가 끝나고 몇 달이 지나서 기해농민봉기가 발발하였다. 기해농민봉기의 중심 인물은 전라도 정읍 만화동[현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입암면 하부리 만화마을]에 거주하였던 최익서(崔益瑞)였다. 최익서는 손화중포에 속한 인물로 동학농민혁명이 끝난 후 중요 수배자 명단에 오른 핵심 인물이었다. 최익서는 동학농민혁명이 끝난 이후 재봉기를 준비하고자 1896년 10월 경 손병규, 홍계관 등 8인과 더불어 최시형을 접견하고 9개의 대접(大接)을 설치하고자 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이에 최익서 등은 북접 교단의 지원 없이 독자적으로 정읍대접(井邑大接)을 설치하고 이에 대한 탄압을 피할 구실로 영학계(英學契)를 조직하였던 것이다. 당시 고부 말목장터[현재 정읍시 이평면 소재지]를 중심으로 영국인 선교사가 선교 활동을 폈는데, 고부(古阜), 흥덕(興德), 고창(高敞), 장성(長城), 영광(靈光), 무장(茂長), 함평(咸平) 등지의 군민들인 대부분 동학(東學) 여당(餘黨)들이 참여하였다. 최익서는 동학 여당들을 모아 영학계를 조직하였다.
영학계의 핵심 인물들은 수계장에 정읍의 최일서(崔一西)[익서(益西)]와 장성의 송문여(宋文汝)[장성 사거리(長城 四巨里)], 서사(書寫)[서기(書記)]에 차일용(車一用)[장성 검암(長城 黔岩)], 수전유사(收錢有司)[재무(財務)]에 김태서(金台書)[영광군 삼남면 이문리(靈光郡 森南面 里門里)]였다. 이들은 1899년 2월 이화삼의 석방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이 봉기에 앞장선 인물은 정읍의 최익서이다.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인물로 동학의 대접주였던 형 최방서(崔方西)를 앞세워 제읍(諸邑)의 접주들을 선동하여 정읍·장성·고부·태인·흥덕·무장·고창·김제·부안·전주·순창·담양·나주·광주 등 17개 지역 접주들이 참여하게 되었고, 이들을 따라 1,000여 명의 농민들이 일제히 호응하였다. 영학계의 목표는 고창 등지를 공격하여 무기를 확보한 뒤 영암민란소(靈巖民亂所)로 향하여 세력을 합하여 광주를 점령하고, 그리고 전주를 함락한 뒤 서울을 공격하려는 것이었다. 또 목포를 습격하여 외국인을 징벌할 계획도 세웠다.
최익서 등은 이런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위하여 1899년 [음력] 4월 18일 전라도 정읍현 입암면 왕심리에서 기해농민봉기를 일으켰다. 최영두의 공안(供案)[죄인을 신문한 내용을 적은 기록문]을 보면 다음과 같다. “음력 4월 18일 밤에 저의 아들 익서 및 고창 사는 박정집(朴正執) 등 32명을 데리고 고부군으로 가서 서양 양총 11자루와 천보총(千步銃) 15자루, 조총 150자루, 화약 2상자, 철환(鐵丸) 1상자, 탄자(彈子) 50개를 찾아서 가지고 말 5필로 싣고 왔습니다. 동군 삼거리 주점에 도착하여 마필은 읍내로 돌려보내고, 짐꾼을 정하여서 정읍의 왕심리(旺尋里)로 가지고 왔습니다. 그 동네 안경운(安京云)의 집에서 저녁을 먹은 후에 흥덕으로 가서 아침을 먹은 뒤 사포(沙浦)로 향하였습니다.”
고창 수성군과 광주 관병은 4월 23일[양력 6월 1일] 새벽 3시 경에 최익서가 이끈 농민군 200명과 교전하였다. 마침 지척의 피아를 가릴 수 없을 정도의 폭우가 내리는 바람에 농민군의 주 무기인 화승총을 사용할 수가 없어 패하고 농민군은 소총 70여 정을 빼앗기며 물러서고 말았다. 한편, 일제는 일본군을 태운 군함을 목포항에 입항시켜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개입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날이 밝자 고창성(高敞城) 싸움에서 패퇴한 농민군들이 다시 고창군의 서쪽 5리쯤 되는 곳인 월계촌 뒤 서로 바라보는 곳에 집결하여 총을 쏘며 저항하였는데 관군이 갑자기 나타나 공격하는 바람에 고부군 난산(卵山)[알뫼]장터로 후퇴하였다가 추격하여 온 관군과 접전을 벌였으나 패하고 말았다. 난산 싸움에서 적지 않은 사상자를 내고 최익서를 비롯한 많은 농민군이 관군에 잡혔다. 관군에 잡힌 이들은 17개 군의 농민 200여 명에 이르렀다. 한편 최영두가 이끈 농민군은 무장읍에서 머물다가 비 때문에 지체하는 사이에 고창 전투에 동참하지 못하고 뒤 늦게 고창의 증대점(曾大店)에 도착하였는데, 최익서가 이끈 농민군 본대가 패하여 흩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
[결과]
기해농민봉기의 지도자는 최익서로 확인되고, 김낙철[김여중]과 김문행, 홍계관이 또한 주모자로 지목되었다. 수배자 명단의 우두머리는 모두 18명으로써 정읍의 최익서, 최방서, 고부의 송성일, 장성의 최사칙, 흥덕의 김재명, 최치홍, 무장의 성재명, 부안의 김여중, 태인의 김문행, 이덕수, 김제의 홍양범, 나주의 허관일, 광주의 이관일 그리고 거주 불명의 전경조, 고창의 홍낙관, 홍계관이다. 최익서의 계획은 고창성을 습격하여 무기를 거두어 가지고 영암(靈巖)으로 내려가 당시 영암 농민군 지도자였던 최(崔)옵바시와 합세하여 광주(光州)를 습격하고 이어서 전주감영을 점령한 뒤 서울로 진격한다는 계획이었으나 고창에서 그만 실패하고 말았다. 최익서의 아버지 최영두는 1899년 4월 22일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1899년 9월 13일 전주 감옥에서 사망하였으나 최익서는 체포되지 않고 피신 생활을 하다가 1918년에 사망하였다.
[의의와 평가]
기해농민봉기는 동학의 잔존 세력, 특히 손화중포에 속한 정읍의 최익서와 고창의 홍계관과 홍낙관이 주동이 되고, 김개남포의 김문행 그리고 북접 계열의 김낙철 등이 중심이 되어 전라도 17개 지역민들이 연대하여 1894년 동학농민혁명 때에 못다 이룬 사회 변혁의 꿈을 실현하고자 하였던 사건이었던 것이다. 기해농민봉기는 정읍에서 일어나 흥덕을 점령한 후 고창을 공격하다 좌절되었지만 그 목표는 영암의 농민항쟁 세력과 합세하여 광주 및 목포 그리고 전주를 점령하고 궁극적으로는 서울로 향하는 것이었다. 비록 또 한 번의 좌절로 끝났으나 동학농민혁명의 불씨가 꺼지지 않았음을 보여준 사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