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300434
한자 東學農民革命
이칭/별칭 동학농민운동,갑오농민전쟁,동학농민전쟁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조광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단 시기/일시 1893년 - 만석보 수세 징수
발생|시작 시기/일시 1894년 1월 10일 - 고부농민봉기 발발
종결 시기/일시 1894년 3월 30일연표보기 - 동학농민혁명 종결
발생|시작 장소 고부농민봉기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고부면 지도보기
성격 봉기
관련 인물/단체 전봉준|김개남|손화중|최경선|김덕명

[정의]

1894년 전북특별자치도 정읍 지역에서 반봉건·반외세의 기치를 두고 일어난 동학교도와 농민들의 혁명적 봉기.

[개설]

동학농민혁명(東學農民革命)은 1894년 동학교도와 민중들이 일으킨 대규모 항쟁으로, 동학농민운동, 갑오농민전쟁, 동학농민전쟁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고종과 민씨 정권의 부패와 지방 수령들의 탐학이 원인이 되어 일어났다. 1894년 1월[음력]의 고부농민봉기·무장기포·백산봉기·황토현 전투·황룡촌 전투·전주성 점령·집강소 통치·9월 삼례봉기·공주 우금치 전투 등 1년 여에 걸쳐 전개되었다.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민씨 정권은 청군을 끌어들여 결국, 조선 내에서 청일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군은 동학농민군을 진압하였다. 1894년 3월 30일 전봉준·손화중·최경선·김덕명·성두환 등 동학농민군 지도자들이 처형되면서 항쟁은 실패로 막을 내렸다. 2023년 5월 18일 동학농민혁명 관련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역사적 배경]

19세기 순조, 헌종, 철종 3대 60여 년에 걸쳐 나이 어린 왕들이 즉위하게 되자 안동 김씨로 대표되는 이른바 세도 정치가 이루어지면서 중앙 정치 기강의 문란을 가져왔다. 중앙 정치 기강의 문란은 탐관오리의 득세를 가져왔으며 사회는 동요되고 삼정의 문란을 초래하였다. 삼정이란 봉건적 수취 체제의 기본이 되는 전정[토지세], 군정[16~60세에 해당하는 성인 남자들이 군대를 안 가는 대신 내는 세금], 환곡[춘궁기에 정부에서 곡식을 빌려주고 추수기에 갚도록 한 제도]을 말하는데, 곧 지방관들의 농간으로 수탈의 수단이 되어 농촌 사회의 파탄을 가져왔다. 수탈에 견디다 못한 농민들은 산속에 들어가 화전민이 되거나 고향을 떠나 유랑민이 되어 굶어 죽는 자가 속출하였고 이로 인한 민중의 불만은 더욱 커졌으며 이러한 봉건 사회의 모순을 스스로 해결하려는 민중 의식이 싹트게 되었다. 세도 정치의 폐단이 심하여지는 가운데 1862년 이후 전국 각지에서 농민 봉기가 일어났다. 이러한 농민 항쟁의 조직과 기반이 된 것은 동학이었다. 동학은 경주 출신의 몰락 양반 최제우가 자본주의 열강이 점차 침략의 야욕을 뻗쳐오던 1860년 서학[천주교와 서양 문물]에 대응하여 창시한 민족 종교였다.

1864년 고종이 즉위하자 실권자가 된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이 왕권의 회복을 내세우며 안동 김씨를 비롯한 세도가들을 대거 숙청함으로써 세도 정치는 막을 내리는 듯하였다. 그러나 1873년에 대원군이 최고 권력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자 명성황후의 집안인 여흥 민씨(驪興 閔氏)에 의하여 세도 정치가 다시 시작되었다. 1876년(고종 13) 일본의 강압으로 강화도조약이 체결된 이후 조선은 청·일의 각축장이 되었으며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이 일어나 조선 사회는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그러나 이때마다 민씨 정권은 청에 의존함으로써 조선은 청의 속국이나 다름없는 처지가 되어 버렸다. 이에 일본은 한편으로는 청과의 일전을 준비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조선 내에서 정치적 열세를 만회하고자 경제적 침략에 주력하였다. 조선은 일본의 상품 시장인 동시에 원료 공급지 및 식량 공급지로 전락하였다.

1876년 개항이 이뤄졌고 이후 조선은 청·일 양국의 각축장이 되었으며 1882년 임오군란과 1884년 갑신정변을 진압한 청이 조선에 대한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에 일본은 조선 내에서 정치적 열세를 만회하고자 경제적 침략에 주력하게 되어 조선은 일본의 식량 공급지가 되어 버렸다. 값싼 생필품을 미끼로 한 일본의 쌀 수입이 늘어나게 되자 국내 쌀 값은 폭등하게 되어 조선 민중은 물가고와 식량 부족에 허덕이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정부는 이전보다 훨씬 많은 세금을 거두어 백성을 수탈하였으며 매관매직 또한 여전히 성행하였다. 이렇듯 당시 백성들은 외세의 정치·경제적 침략과 민씨 척족들의 매관매직으로 인하여 야기된 지방 수령의 탐학이라는 이중의 고통을 겪어야만 하였다.

[경과]

고부 지역은 호남 제일의 쌀 생산지이며 농산물 집결지였다. 그뿐만 아니라 서해안을 끼고 있어 해산물 또한 풍부하였다. 그런 만큼 다른 어느 지역보다도 봉건적 수탈과 일제의 경제적 침략이 극심한 곳이었다. 부패한 고부군수 조병갑의 학정은 마침내 고부농민봉기를 촉발시켰다. 1894년 1월 10일 밤 고부군 배들평야[현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이평면] 주변 10여 마을의 농민들은 예동(禮洞)에서 풍물패에 이끌려 말목장터로 모여들었다. 이날 밤 일장 연설을 마친 전봉준은 모인 농민들을 두 패로 나누어 고부관아를 향하여 진격하여 1월 11일 새벽에 점령하였다.

이때 조병갑은 이미 몸을 숨겼으며 수천의 분노한 농민들은 감옥을 부수고 무고한 백성들을 석방하였으며, 창고 문을 열어 강탈당하였던 곡식을 인근 빈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원한의 대상인 만석보를 허물어 버리고 말목장터에 진을 치는 한편 백산에 토성을 쌓기 시작하였다. 1894년 3월 26일 정읍·고창·무장·태인·금구·김제·부안·영광 등지에서 몰려든 농민들은 백산에 집결하였다. 여기서 전봉준을 총대장으로 손화중김개남을 총령관으로 추대하고 오시영, 최경선 등을 영솔장으로 하였다. 전봉준 등은 백산에 총사령부 격인 호남창의 대장소를 두고 창의문과 격문을 발하여 민중의 총궐기를 호소하였다.

이에 정부는 4월 2일 홍계훈을 양호초토사로 임명하여 중앙군 800여 명을 파견하였다. 한편 전라감영에서는 감영군과 보부상으로 구성된 2,400여 명의 연합 부대를 구성하여 4월 3일 백산으로 출동시켰다. 4월 7일 황토현에서 관군을 크게 격파한 농민군은 정읍관아를 점령하고 4월 8일 흥덕과 고창을 점령한 후 4월 9일에는 무장읍성을 점령하였다. 무장에서 3일 간 전열을 정비한 동학농민군은 4월 12일 영광을 점령한 후 함평, 나주를 거쳐 4월 21일 장성으로 향하였다.

4월 7일 전라감영군이 황토현에서 대패한 날 홍계훈이 이끈 중앙군이 전주에 도착하였다. 홍계훈은 증원군을 요청하여 충원되자 동학농민군의 뒤를 추격하였다. 4월 23일 장성 월평장터와 황룡강 가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있던 동학농민군을 발견하고 급습하였으나 장태를 앞세운 동학농민군에게 도리어 참패당하였다. 동학농민군은 여세를 몰아 곧장 전주로 진격하여 4월 27일 전주성을 점령하였다. 이에 다급하게 된 조정에서는 청에 원병을 요청하여 5월 5일 청군이 조선에 들어왔으며 일본군도 텐진조약과 거류민 보호를 구실로 5월 7일 인천항에 상륙하게 되어 이제 조선은 청·일의 각축장이 되고 말았다. 이러한 민족적 위기를 맞이한 동학농민군은 5월 8일 정부가 요청한 휴전 제의에 각종 폐단의 시정을 요구하였고, 마침내 정부와 화약을 맺어 해산하였다. 그리고 전라도 일대에 농민군 자치기구인 집강소를 설치하여 각종 폐단을 스스로 바로잡아 나갔다.

그러나 일본의 도발로 청일전쟁이 일어나 조선의 강토는 외적들의 전쟁터가 되고 말았다. 동학농민군은 일본군의 경복궁 난입을 계기로 일제에 항거하고자 1894년 9월 전라도 삼례에서 재차 봉기하였다. 10월 16일 논산에 집결한 동학농민군은 이인 등지에서 승리를 거두고 공주를 향하여 북상하였다. 11월 8일 공주로 진격하여 우금치 고개에서 일본군의 우수한 화력에 맞서 동학농민군은 수십 차례 접전을 벌었으나 끝내 참패하고 말았다.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패한 동학농민군들은 논산, 금구, 태인 등 각지에서 일본군과 관군에 맞서 완강히 싸웠으나 또 다시 패하고 전봉준 등 동학농민군 지도자들이 체포됨으로써 1년 여에 걸친 항쟁의 막을 내리게 되었다.

[결과]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기 위하여서는 동학농민군이 최대의 걸림돌이 되리라 판단한 일본군은 후퇴하는 동학농민군을 완전히 토벌하기 위하여 남도 끝까지 추격하였다. 그 결과 수만 명의 동학농민군과 무고한 백성들이 일본군과 관군, 그리고 지방 수령들에 의하여 잔인한 살육을 당하였다. 이로써 전봉준과 동학농민군이 꿈꾸었던 평등한 세상, 반외세의 자주적인 국가 건설이라는 꿈은 좌절되었다. 동학농민혁명이 끝난 이후 조선 사회는 계층 간의 갈등이 더욱 심화하였으며 탐관오리들의 수탈 또한 여전하였다. 동학농민혁명 지도부가 대부분 처형되고 살아남은 잔여 동학농민군은 각지로 흩어져 잠적하였다. 그중 일부는 살 길을 찾아 친일로 돌아서는 일도 있었으나 동학당(東學黨)·영학당(英學黨)·남학당(南學黨)·서학당(西學黨)·화적당(火賊黨)·활빈당(活貧黨) 등의 이름으로 봉건 정부의 탐학과 일제의 침략에 맞서 저항하기도 하였다.

[의의와 평가]

동학농민혁명은 수십 만의 희생자를 낸 채 비록 좌절되었지만 조선 후기 농민 항쟁을 통하여 성장한 농민 대중이 나라의 진정한 주인임을 자각하여 낡은 봉건적 사회 질서를 타파하고 자본주의 열강의 침략을 물리치기 위하여 반봉건, 반외세의 기치를 높이 든 우리 역사상 최대 규모의 민중 항쟁이었다. 따라서 동학농민혁명은 다음과 같이 한국 근현대사에 대단히 큰 영향을 미쳤고,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첫째, 동학농민혁명은 우리나라의 근대화를 가로막고 있던 구 체제를 붕괴시키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동학농민혁명은 반상 차별을 중심으로 한 신분 제도를 폐지하여 인간 평등의 세상을 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고, 집강소라는 자치 기구를 통하여 현실화시켰다. 1894년 갑오개혁을 통한 사회 신분제의 폐지는 조선의 하층민들이 동학농민혁명 과정에서 줄기차게 외쳤던 주장을 갑오개혁을 추진하려는 정부에서 받아서 법령으로 확정 지은 것이었다.

둘째, 1894년 5월부터 11월까지 약 7개월 간 전라도 지역을 중심으로 한 집강소 통치는 비록 한시적이긴 하지만 우리 역사에서 처음으로 민중들의 뜻에 따라 새로운 제도와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낸 귀중한 경험이었으며 민중에 의한 근대 개혁의 지방 통치 모형을 제시한 것이었다.

셋째, 우리 근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는 백성이 주인이 되는 민주화와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수호하여 자주 독립 국가를 만드는 일이었다. 동학농민군은 이러한 민족 자존을 위하여 일제의 침략에 맞서 일어섬으로써 근대 민족 운동의 효시가 되었으며 반봉건의 민주화와 반외세의 자주 독립이라는 올바른 역사 발전의 방향을 제시하였다.

넷째, 동학농민혁명에 참가한 동학농민군들이 1895년 을미사변을 계기로 일어난 의병에 일부 합류하여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에 대한 의병 항쟁에 참여하였고, 이후 3·1운동과 독립군의 활동으로 이어졌다.

다섯째, 동학농민혁명은 서구 열강의 침략에 대한 아시아 민중의 반제국주의 투쟁의 선구적 역할을 함으로써 중국의 태평천국혁명, 인도의 세포이 투쟁과 함께 제국주의 세력에 대항한 19세기 아시아의 3대 농민 전쟁의 하나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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