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오창의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300440
한자 丙午倡義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김재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06년 6월 4일연표보기 - 병오창의 봉기
발생|시작 장소 무성서원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칠보면 원촌1길 44-12[무성리 500]지도보기
성격 의병
관련 인물/단체 최익현|임병찬

[정의]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무성서원에서 최익현임병찬의 주도로 기병한 호남 최초의 의병.

[개설]

최익현은 1906년 6월 4일 태인 무성서원[현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에서 문도 80명을 모아 강회를 열고 행동을 개시하였다. 여기에 유생들 외에 강종회(姜鍾會) 등 포사(炮士) 30여 명이 참가하여 사기를 높였다. 최익현의 기병 목적은 의병을 거느리고 북상하여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와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및 각국 공사를 불러 담판하여 을사늑약을 파기하고, 국가의 자주권을 회복하여 민중을 일제로부터 구하는 데 있었다. 최익현무성서원의 강회를 기화로 봉기하여 태인, 정읍, 곡성 등지를 거쳐 순창으로 진출하였다. 1,000여 명의 태인의병이 활동에 들어가자 정부와 일제는 곧바로 대응 조치를 취하였다. 국왕은 최익현에 대하여 궁내부특진관의 직을 박탈하고 동시에 광주관찰사 이도재(李道宰)를 통하여 해산 명령을 전달하였다. 면암은 단호히 해산 명령을 거부하였다. 하지만 전주와 남원의 진위대가 순창으로 출동하자 최익현은 “동족끼리는 싸울 수 없다”라며 해산을 명령하였다. 최익현의 의병이 이와 같이 당초 기대한 것만큼 큰 호응을 얻지는 못하였던 것은 태인의병의 거병 목표가 전주를 거쳐 북상하여 서울에 포진한 일본 세력과 외교적 담판을 벌여 일본 세력을 몰아내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역사적 배경]

을사늑약으로 우리의 외교권이 박탈되자 의병전쟁이 확대되는 계기가 되었다.

[경과]

태인의병의 영향은 전국적으로 미쳤다. 쓰시마섬에 끌려간 최익현 일행이 온갖 고초 끝에 순국한 사실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태인의병의 영향을 받아 전라남도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하였다. 최익현의 뜻을 계승한 인물로 백낙구·기우만·고광순·이항선 등을 들 수 있고, 그 밖에도 강재천·기우일 등이 포함된다. 임진왜란 당시 고경명의 후손인 고광순은 태인의병에 참여하려다 좌절되자, 백낙구 등과 연합하여 의병을 도모하였고, 전남 능주에서 의병을 일으켰던 양회일도 최익현의 영향을 받았다. 태인의병에 가담하였던 양윤숙도 다시 의병을 일으켜 순창을 중심으로 대일 투쟁을 벌이다 1909년 체포되었다. 임실 출신의 이석용(李錫庸)과 전수용(全垂鏞) 등도 최익현에게 사숙한 유생들로 호남 지역의 후기 의병을 주도한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진주에서는 최익현의 문인 노응규(盧應圭)가 태인의병에 합류하였다가 해산된 후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 태인의병이 약 1,000명이라는 의병을 모아 놓고도 이렇다 할 활동을 전개하지 못한 것은 태인의병의 절반이 유생들이었고, 무기를 소지한 자가 200~300명에 지나지 않아서 자연히 투쟁 역량이 미흡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결과]

최익현이 의병 해산을 지시하였으나 마지막까지 최익현의 곁을 떠나지 않은 임병찬을 비롯한 고석진·김기술·최제학·문달환·임현주·양재해·조우식·조영선·나기덕·이용길·유해용 등을 일러 ‘12의사’라고 한다. 모두 체포됨으로써 태인의병은 해산되었다. 체포된 태인의병은 일본군 헌병사령부로 끌려갔다. 일제는 1906년 8월 14일 군율위반죄를 적용하여 최익현에게 쓰시마섬 감금 3년, 임병찬에게 감금 2년, 고석진, 최제학에게 군사령부 감금 4개월, 나머지에게는 태형 100대를 선고하였다. 그 후 최익현은 1907년 1월 1일 새벽에 쓰시마섬에서 순국하였다.

[의의와 평가]

태인의병은 상소 운동에서 무장 투쟁으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한말 후기 의병의 방향을 제시한 것으로 주목된다. 또 국모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일어난 을미의병과 달리 태인의병[병오창의]은 국권 회복을 위하여 일어난 의병이었다는 데 의의가 있다. 그뿐만 아니라 태인의병에 참여한 사람들 다수가 독립의군부에도 가담하였다는 점에서도 의의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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