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3004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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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抗日義兵運動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김재영 |
[정의]
1895년에서 1910년 일제에 의하여 강제 합병되기 전까지 일어난 정읍 지역의 항일 무장 투쟁 운동.
[개설]
박은식(朴殷植)은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에서 “의병은 국가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자발적으로 궐기하여 국가를 위하여 싸우는 의군(義軍)”이라 정의하였다. 서양인들은 ‘정의의 군대’라는 말에 초점을 맞추어 ‘Right Army’라 기록하였다. 하지만 의병은 정의의 군대라는 의미보다는 국가를 위하여 자발적으로 일어났다는 면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의용군(義勇軍)이라는 의미의 ‘Volunteer’라는 용어가 더 적절한 것으로 보인다. 일제의 침략을 저지하기 위하여 무장 투쟁으로 국권을 회복하려는 사람 또는 집단이라는 의미의 개념이 본질에 더 가깝다.
[역사적 배경]
한말 의병은 1895년을 전후하여 봉기하였다. 일본의 경복궁 침범과 명성황후 시해사건, 그리고 단발령 등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를 일러 흔히 ‘전기 의병’이라 한다. 중기 의병은 1905년 을사늑약으로 우리의 외교권이 박탈된 것이 원인이었고, 후기 의병은 1907년 군대가 해산되고 정미7조약이 체결되면서 봉기하였다.
[경과]
전북의병은 최초 의병이 봉기한 지 약 10년이나 늦게 태동하였다. 전북 지역이 동학농민혁명의 진원지로서 후유증이 심각하였기 때문이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뜻있는 우국지사들이 일제의 반식민지로 전락한 대한제국을 수호하기 위하여 의병을 일으켰다. 이때부터 의병을 흔히 ‘중기의병’이라 한다. 전북의병이 태동한 것은 임병찬(林秉瓚)과 고석진(高石鎭)을 비롯한 최익현(崔益鉉)의 문인들이 주도한 태인의병[병오창의]이었다. 태인의병은 전주를 거쳐 북상하여 서울에 포진한 일본 세력을 몰아내고자 하였다. 태인의병은 정읍·순창·곡성 등지를 순회하며 포수의 확보에 힘을 기울였다. 일주일 만에 의병의 규모가 1,000여 명으로 증가하였다. 하지만 그중 절반이 유생들이었으며, 포수로 총을 가진 의병은 300명 정도에 불과하였다. 태인의병이 순창으로 진격하자 조정에서는 전주와 남원의 진위대를 급히 파견하였다. 이에 최익현은 “동족끼리 싸울 수는 없다”라며 해산 명령을 내림으로써 약 열흘 만에 태인의병의 활동은 종식되었다.
전북 지역 중에서도 주로 서부 지역에 해당하는 고창, 군산, 부안, 정읍 일원에서 전개된 의병 활동을 정리하면, 고창 157명, 군산 39명, 부안 59명, 정읍은 고부와 태인을 포함하여 207명으로 총 462명이다. 의진별로 보면 독립의군부에 31명, 이성화 의진에 23명, 김영백 의진에 15명, 최익현 의진에 10명, 송박사 의진에 5명, 전해산·정성현·정일국 의진에 4명이 있다. 정읍은 이와 같이 의병장이 다양하였을 뿐만 아니라 순창[264명] 다음으로 많은 의병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정읍 지역 출신 의병장으로서 가장 활발한 항일 무장 투쟁 활동을 전개하였던 인물이 이성화(李成化)이다. 이성화는 고부 출신으로 1908년경 의진을 조직하여 고부·태인·순창·부안·정읍 등지에서 무려 15회에 걸쳐 일본 군경과 교전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일제는 이성화의 의진을 토벌하기 위하여 21회나 출동하였다.
[의의와 평가]
태인의병의 활동은 전라도 전체에 영향을 주었으며, 전라도 의병의 활성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태인의병에 자극을 받아 의병을 일으킨 대표적인 의병장은 맹인의병장 백낙구(白樂九)를 비롯, 임실에서 거병한 평해군수를 지낸 강재천(姜在天), 이족(吏族) 출신으로 남원에서 봉기한 양한규(梁漢奎)와 운봉을 기반으로 의병을 도모하였던 박봉양(朴鳳陽) 등이 있다.
이후 전북의병의 본격화와 장기 항쟁을 주도한 인물이 최익현의 문인인 이석용(李錫庸)[1877~1914]이었다. 진안 마이산에서 의병을 일으켜 ‘호남창의소’라 명명하고 주로 임실을 무대로 영남·호남을 왕래하면서 일본의 병참(兵站)을 약탈하거나 일병을 살해하였다. 임실 출신 의병장 전기홍(全基泓)[1879~1910] 역시 마이산에서 의병을 일으킨 이석용의 ‘창의동맹단’에 가담하였다. 이밖에 충남 회덕 출신의 김동신(金東臣)[1872~1933]은 1907년 8월 내장사에서 의병을 일으켜 지리산으로 이동한 뒤에는 김동신의 의진을 ‘삼남창의소’라 불렀다. 진안 출신의 황준성(黃俊聖)[1879~1910]은 태인의병에 가담하였다가 체포되어 완도에 유배되었으나 완도에서 의병장으로 추대되었다. 순창 출신 양춘영(楊春泳)은 군주사를 역임한 인물로 태인의병에 가담한 뒤 1908년 7월 의병을 일으켜 회문산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고창의 김공삼(金公三), 박도경(朴道京), 남원의 정일국(鄭一國), 익산의 이규홍(李圭弘) 등의 의병 활동도 주목된다. 김공삼과 박도경은 기삼연의 ‘호남창의회맹소’에 참여하였으며, 정일국은 태인의병에 참여하였다가 지리산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전북의병은 그 후 나라가 망하자 국내 비밀 결사인 독립의군부와 광복회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따라서 전북의병은 의병에서 독립군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국내의 비밀 결사 운동을 주도한 점에서 그 역사적 의미를 찾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