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300494 |
---|---|
한자 | 井邑 古沙夫里城 |
영어공식명칭 | Gosaburiseong Fortress, Jeongeup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지역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고부면 고부리 산1-1 |
시대 | 고대/삼국 시대/백제 |
집필자 | 강원종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2002년 - 정읍 고사부리성 발굴 조사 |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2003년 - 정읍 고사부리성 시굴 조사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2004년 - 정읍 고사부리성 발굴 조사 시작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2006년 - 정읍 고사부리성 발굴 조사 종료 |
문화재 지정 일시 | 2008년 5월 28일![]()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2010년 - 정읍 고사부리성 발굴 조사 시작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2011년 - 정읍 고사부리성 발굴 조사 종료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2021년 11월 19일 - 정읍 고사부리성 사적으로 변경 지정 |
현 소재지 | 정읍 고사부리성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고부면 고부리 산1-1
![]() |
성격 | 산성 |
크기(높이,길이,둘레) | 1,050m[둘레] |
면적 | 63,484㎡ |
문화재 지정 번호 | 사적 |
[정의]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고부면 고부리 성황산에 있는 백제 시대 산성.
[개설]
정읍 고사부리성(井邑 古沙夫里城)은 백제 시대 지방 통치 체제인 5방성 중의 중방 고사성으로 삼국 시대에 처음 축성되었으며, 조선 시대까지 행정 관아를 둔 산성이다. 정읍 고사부리성은 2008년 5월 28일 사적 제494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보호법시행령」 고시에 따라 지정 번호가 삭제되어 사적으로 변경되었다. 2002년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으며 2003년 시굴 조사를 실시하였다. 2004~2006년까지 발굴 조사를 실시하였으며, 또한 2010~2011년 에도 발굴 조사를 실시하였다.
[건립 경위]
고부(古阜)는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한전(韓傳)의 마한(馬韓) 54개의 소국 중 고비리국(古卑離國)으로 비정되고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와 『고려사(高麗史)』,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등에서 고부군은 본래 백제 고사부리군(百濟 古沙夫里郡)이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정읍 고사부리성의 축성과 관련된 문헌 기록은 『삼국사기』「백제본기」 온조왕 36년(18) 조에 “원산(圓山), 금현(錦峴)을 수즙(修葺)하고 고사부리성(古沙夫里城)을 쌓았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주서(周書)』 열전(列傳) 41 이역(異域) 상(上) 백제전(百濟傳)에는 “치고마성 기외경유오방 중방왈고사성 동방왈득안성 남방왈구지하성 서방왈도선성 북방왈웅진성(治固麻城 其外更有五方 中方曰古沙城 東方曰得安城 南方曰久知下城 西方曰刀先城 北方曰熊津城)”이라고 하여 고사성이 중방성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기록을 통하여 백제는 일찍이 마한 지역으로 진출하는 과정 중 고부 지역의 중요성을 보여 주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문화유적총람』에는 고부산성(古阜山城)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고려 현종(顯宗)조에 축성한 읍성(邑城)이며, 고부의 성읍(城邑)은 백제 시대 고사부리군은 영원면 은선리(隱仙里)이고, 고려의 영주읍성(瀛州邑城)은 두승산(斗升山)의 남록(南麓) 고부면 입석리(立石里)였다. 입석리에서 고부읍으로 이건한 연대는 950년(광종 2)에 고부를 안남(安南)이라 개칭하고 도호부(都護府)를 설치한 후 1019년(현종 10)이었다. 그리고 1765년(영조 41) 현재의 초등학교 터로 이읍(移邑)할 때까지 고부읍성은 성황산 정상에 있으나 현재는 겨우 성 터만 남아 있고 대부분 경작지로 변하였다”라고 하여, 고부산성은 고려 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위치]
정읍 고사부리성은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고부면 고부리 산1-1 일원의 높이 133m 성황산[영원면]에 있다. 정읍 고사부리성이 있는 산 남쪽 아래에는 고부향교와 고부관아터가 있다.
[형태]
정읍 고사부리성은 성황산과 서쪽의 민락정(民樂亭)이 있는 두 봉우리를 감싼 것으로, 평면 형태는 북동쪽과 남서쪽으로 긴 장타원형의 형태이다. 성황산과 남서쪽의 봉우리를 감싸고 있는 마안봉(馬鞍峰) 형태의 석성이었다가 조선 시대에는 흙으로 고쳐 쌓았다. 성곽의 둘레는 1,050m이며, 북동-남서 길이 418m, 북서-남동 너비는 200m 내외이다.
백제 시대 성벽은 산 경사면을 깎은 후 바깥 면에서만 성돌을 쌓은 형태[내탁(內托)]와 바깥 면과 안쪽 면을 함께 쌓은 형태[협축(夾築)]로 구분되는데, 지형에 따라 선택적으로 사용하였다. 바깥 면의 성돌은 사각형 및 직사각형 모양으로 잘 다듬어서 수평적으로 줄쌓기[바른층쌓기]를 하였으며, 위로 올라갈수록 조금씩 성돌을 들여 가며 쌓았다. 성돌 사이는 그랭이질[두 성돌의 표면을 맞붙게 하도록 면을 가공하여 주는 작업]을 하여 틈새가 없도록 하였다. 안쪽 면의 성돌은 바깥 면의 성돌보다 더 다듬거나 다듬지 않은 돌을 사용하였다. 조선 시대의 토축 성벽은 석성의 윗면에 수평으로 흙을 성토다짐을 하여 사용하였다.
성문 터는 북문, 서문, 남문이 조사되었다. 북문과 서문은 성벽을 서로 어긋나게 겹치면서 틈새를 두어 성문을 둔 어긋문식이다. 이러한 성문은 외부에서 성문이 드러나지 않는 게 특징적이다. 한편, 북문 터의 조사에서 ‘상부상항(上部上巷)’명의 백제 시대 기와편이 출토되었다. 남문은 조선 시대 개거식(開渠式)[성벽이 단절되었다가 다시 이어지는 형태로 사이에 문을 두는 형식]의 성문 터가 조사되었다. 통로부의 바닥 면에서 정면 3칸, 측면 2칸의 주혈(柱穴)[기둥 구멍]이 확인되어 문루(門樓)를 두었던 성문의 형태로 조선 시대에 수리된 것으로 추정된다.
성 내부의 두 봉우리 가운데 북쪽은 지대가 낮은 곳으로써 집수지(集水址)가 조사되었다. 집수지는 백제에 의하여 만들어진 이후 한 차례 수리되었는데, 1차 집수지의 평면 형태는 방형이 규모는 길이 850㎝, 너비 500㎝이다. 집수지는 구덩이를 판 후 삿자리[갈대와 같은 초본류를 엮어 만든 자리]를 바닥과 벽면에 깐 다음 점토를 바르고 나서 돌을 쌓아 만든 것으로 삿자리의 설치는 방수를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 2차 집수지는 1차 집수지를 보수하면서 확장되었는데 평면 형태는 장방형이며, 길이 1,380㎝, 너비 790㎝, 깊이 300㎝ 내외이다. 집수지의 북쪽으로는 성 내부의 물을 밖으로 내보내는 수구(水口) 터가 조사되었는데, 경사가 심한 암반층을 깎아 단을 만들었다. 집수지의 바닥면에서는 기마병의 모습을 선(線)으로 새긴 백제 시대 기와편, ‘본피관(本彼官)’명의 통일 신라 시대 기와편 등이 출토되었다.
성 내부에서는 조선 시대 건물 여러 기가 조사되었는데, 전체적인 형태를 보여 주는 건물 터는 민락정, 긴 형태의 건물, 객사 터 등이 있다. 먼저 성황산 반대편 봉우리에는 정면 5칸, 측면 4칸의 민락정 터가 조사되었다. 긴 형태의 건물 터는 두 봉우리 사이에서 정면 9칸, 측면 2칸의 규모로 확인되었는데, 건물 내부에서는 백자 제기(祭器)와 탄화곡물(炭火穀物)이 출토되어 제사나 제사에 사용된 제물을 보관하는 장소로 추정하고 있다. 그리고 객사 터는 성황산 봉우리의 남동편 평탄한 대지에서 조사되었다. 객사 터에는 가운데에 정청(正廳)이 있고 좌우에 동·서익헌(翼軒)으로 구성되었다. 정청은 정면 3칸, 측면 3칸이고, 동익헌은 정면 5칸, 측면 3칸, 서익헌은 정면 3칸, 측면 3칸이다. 정청 정면에는 길이 12m, 너비 4m의 월대(月臺)를 갖추고 있다. 객사 터에서는 ‘옹정 12년(雍正 十二年)’명 막새편과 조선 시대 백자와 기와 등이 다량 출토되었다.
[현황]
정읍 고사부리성 남쪽 성벽 앞쪽에는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으며, 부근의 성벽은 복원되어 있다. 이 외에도 발굴 조사가 완료된 북문 터와 서문 터가 함께 복원되었다. 성 내부도 발굴 조사가 이루어진 이후 복토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정읍 고사부리성은 백제가 부여[사비]에 도읍을 두었던 6세기 무렵에 지방을 5개 구역으로 나누어 다스릴 때 쌓은 5방 중 하나인 중방 고사성으로 고부 지역의 정치·군사·행정의 중심지로 활용되었으며, 통일 신라 때 개축되어 1765년까지 읍치(邑治)로 사용되었다. 백제 시대 ‘상부상항’명이 찍힌 기와와 기마병(騎馬兵)을 새긴 기와편, 통일 신라 시대 ‘본피관’명의 기와편 등 다양한 시기의 유물로 인하여 우리나라 고대 산성 연구에 중요한 문화 유적으로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