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3005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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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武城里三層石塔 |
영어공식명칭 | Three story stone Pavilion in Museong-ri |
분야 | 종교/불교 |
유형 | 유적/탑과 부도 |
지역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칠보면 원촌1길 96[무성리 433-2]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전경미 |
이전 시기/일시 | 1975년 - 무성리삼층석탑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 433-2에서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 25-1 칠보초등학교로 이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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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시기/일시 | 1981년 - 무성리삼층석탑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 25-1 칠보초등학교에서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 433-2으로 이전 |
문화재 지정 일시 | 1998년 1월 9일![]()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2021년 11월 19일 - 무성리삼층석탑 전라북도 유형문화재로 변경 지정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2024년 1월 18일 - 무성리삼층석탑 전북특별자치도 유형문화재로 변경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2024년 5월 17일 - 무성리삼층석탑 전북특별자치도 유형문화유산으로 변경 |
현 소재지 | 무성리삼층석탑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칠보면 원촌1길 96[무성리 433-2]![]() |
성격 | 석탑 |
재질 | 화강암 |
크기(높이) | 4.85m |
소유자 | 무성서원 |
문화재 지정 번호 | 전북특별자치도 유형문화유산 |
[정의]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에 있는 고려 후기 석탑.
[개설]
무성리삼층석탑(武城里三層石塔)은 고려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석탑이다. 1998년 1월 19일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58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보호법시행령」 고시에 따라 지정 번호가 삭제되어 전라북도 유형문화재로 변경되었다. 2024년 1월 18일 전북특별자치도 유형문화재로 변경되었다. 2024년 5월 17일 국가유산청의 「국가유산기본법」 시행에 따라 전북특별자치도 유형문화유산으로 바뀌었다
[위치]
무성리삼층석탑은 석탑은 원래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칠보면 원촌1길 96[무성리 433-2]에 있었다. 1975년 칠보초등학교 교정으로 이건되었다가 1981년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 출신 김진섭, 김창섭, 김석공 형제가 향토문화유산을 원형으로 보호하자는 뜻에서 사재를 들여 원래 위치로 복원하였다.
[형태]
무성리삼층석탑은 단층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석탑으로 높이는 4.85m이다. 길이 2.6m의 지대석 위에 4매의 판석을 사용하여 단층 기단을 조성하였다. 기단의 상면에는 1매의 판석으로 기단 갑석을 놓았는데, 하면에는 부연을, 상면에는 각형 1단의 탑신 괴임대를 조각하였다.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 사진을 보면 기단부는 상하 2단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현재의 기단부는 좌우 측면에 면석을 세우고 정면에 면석을 끼운 형식이며, 배면은 한 장의 면석으로 모퉁이 기둥을 모각하지 않은 채 판석을 놓아 독특한 형식이다.
탑신부의 탑신석과 옥개석은 각각 하나의 돌로 조성하였는데, 이는 각 기둥과 판석을 짜 맞춘 백제 양식이 아닌 하나의 돌에 우주(隅柱)를 모각한 통일 신라 시대 양식을 이어받고 있다. 초층 탑신은 한 변이 1.1m, 높이가 1.14m로 거의 정방형에 가까운 데 비해, 2층 이상은 높이와 너비가 급격히 축소되어 전체적으로 불균형을 이루고 있다. 옥개석 역시 1층이 다른 층에 비해 크게 조성되었다. 낙수면의 길이가 짧고, 경사가 급하여 수평을 이루는 처마는 전각에 이르러 둔중한 반전을 보이고 있으며, 옥개석의 각층 하면에는 각형 3단의 옥개 받침을 조각하였다. 상륜부는 한 돌로 조성된 높직한 노반과 연봉형 보주를 놓았는데, 새로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각 층마다 옥개부의 처마 반전은 크지 않고 탑신부만 보았을 때 경상북도 예천군 보문사삼층석탑과 비슷한 모습이다.
[현황]
무성리삼층석탑 주변에는 1981년 정읍시 칠보면 원촌1길 96[무성리 433-2]로 석탑을 복원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비가 있다.
[의의와 평가]
무성리삼층석탑은 각 부의 양식으로 보아 고려 시대 후기에 조성된 석탑으로 추정된다. 백제 양식을 따르지 않고 신라 양식을 따른 석탑으로 고려 시대 석탑 연구에 학술적 자료로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