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3005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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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東學革命 謀議塔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유적/탑과 부도 |
지역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고부면 신중리 산16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조광환 |
건립 시기/일시 | 1969년 12월 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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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시기/일시 | 1997년 5월 - 동학혁명 모의탑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고부면 신중리 617-1로 이전 |
이전 시기/일시 | 1998년 9월 23일 - 동학혁명 모의탑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고부면 신중리 617-1에서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고부면 신중리 산16으로 이전 |
문화재 지정 일시 | 2016년 7월 26일![]() |
현 소재지 | 동학혁명 모의탑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고부면 신중리 산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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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석탑 |
관련 인물 | 전봉준|송두호|송대화|송기태 |
재질 | 화강암 |
크기(높이) | 220㎝[높이]|60㎝[가로]|60㎝[세로] |
소유자 | 임창욱 |
관리자 | 정읍시 |
문화재 지정 번호 | 정읍시 향토문화유산 제7호 |
[정의]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고부면 신중리에 있는 동학농민혁명의 사발통문 작성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탑.
[개설]
동학혁명 모의탑(東學革命 謀議塔)은 1969년 12월 1일, 사발통문을 작성하였던 송두호의 집이 있는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고부면 신중리에 건립되었다. 고부군수 조병갑의 가렴주구와 만석보 수세 징수로 인하여 원성이 한창 높아진 1893년 11월 초순, 전봉준을 비롯한 농민군 지도자들은 전라도 고부군(古阜郡) 서부면(西部面) 죽산리(竹山里) 송두호의 집에 모여 봉기 계획을 세웠다. 전봉준 등은 봉기의 당위성을 밝히는 격문과 더불어 사발을 엎어 놓은 모양으로 서명한 사발통문을 작성하였다.
사발통문의 내용에는 고부성을 격파하고 군수 조병갑의 목을 벨 것, 군기창과 화약고를 점령할 것, 군수에게 아부하여 인민을 침해한 탐학한 벼슬아치를 징치(懲治)할 것, 전주감영을 함락하고 한양으로 곧바로 올라갈 것 등의 굳은 결의가 담겨 있다. 사발통문은 1968년 12월 4일, 송두호의 후손인 송기태가 송후섭의 집에서 족보를 보다가 우연히 발견하여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동학혁명 모의탑을 건립할 당시 사발통문을 동학혁명 모의탑 밑에 묻었다. 그런데 이후 사발통문의 진위 논란이 일자 진위 여부를 가리기 위하여 1970년 3월 4일, 동학혁명 모의탑을 해체하고 꺼낸 사발통문과 송두호 교장 임명장 등 고문서 4점을 문화공보부로 보내서 감정을 받게 하였다. 사발통문은 한때 독립기념관에 전시되었다가 2024년 현재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덕천면에 있는 동학농민혁명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동학혁명 모의탑은 2016년 7월 26일 전라북도 정읍시 향토문화유산 제7호로 지정되었다.
[건립 경위]
사발통문 발견자인 송기태가 동학농민혁명 기념 사업을 추진하기 위하여 사발통문에 서명한 20인의 후손들에게 연락하여 ‘동학혁명 모의탑 건립 추진 위원회’를 구성하였다. 1969년 12월 1일 총 공사비 20여 만 원을 들여 동학혁명 모의탑을 세웠다. 동학혁명 모의탑은 1997년 5월 도로 확장 공사를 위하여 현재 위치의 건너편인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고부면 신중리 617-1로 이전하였다가, 1998년 9월 23일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고부면 신중리 산16으로 다시 이전하였다.
[위치]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고부면 신중리 대뫼마을 입구 언덕에 있다.
[형태]
동학혁명 모의탑은 5단의 기단 위에 높이 220㎝, 가로 60㎝, 세로 60㎝의 화강석 기둥 모양으로 세웠다. 전면에는 한자로 ‘동학혁명 모의탑’이라는 탑의 명칭, 좌측 면에 사발통문의 내용, 뒷면엔 서명 참여자 20인의 생몰 연대와 후손들의 인적 사항, 우측 면에 비문과 동학혁명 모의탑 건립 추진 위원 34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금석문]
‘동학혁명 모의탑’이라고 새겨져 있다.
[현황]
동학혁명 모의탑은 5단의 기단 위에 세워져 있다. 동학혁명 모의탑 오른쪽에는 사발통문이 작성된 마을임을 알리는 안내판과 주차장이 조성되어 있으며, 역사 기행 탐방 길이 만들어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