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3005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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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泰仁 三·一運動 記念塔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유적/탑과 부도 |
지역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태인면 태성리 산33-6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재영 |
건립 시기/일시 | 1984년 3월 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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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사항 시기/일시 | 2003년 12월 10일 - 태인 3·1운동 기념탑 복원 및 위패 봉안소 건립 |
현 소재지 | 태인 3·1운동 기념탑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태인면 태성리 산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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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기념탑 |
재질 | 화강암 |
크기(높이) | 5m[높이]|29.4m[너비]|3.5m[흉고] |
[정의]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태인면 태성리에 있는 3·1운동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기념탑.
[개설]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태인면에서는 1919년 3월 16일 태인 장날을 기하여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김현곤(金玹坤), 송수연(宋洙淵), 박지선(朴址宣) 등은 고종 황제의 장례일에 참석하기 위하여 서울로 올라갔다가 3·1운동의 현장을 목격하고 곧바로 고향인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태인면으로 내려왔다. 친구 사이였던 세 사람은 고향으로 내려온 즉시 만세 운동을 목적으로 송한용(宋漢鏞), 송진상(宋鎭相), 오석흥(吳錫興), 송영근(宋榮根), 김진호(金鎭皓), 유치도(柳致道), 김순곤(金淳坤), 송덕봉(宋德奉), 김진근(金鎭根), 백복산(白福山), 김용안(金龍安), 최민식(崔民植), 김부곤(金富坤) 등과 함께 15인회를 조직하고 각자 역할을 분담하였다. 이들은 거사 전까지 마을 사람들 50여 명과 함께 김달곤의 집에서 만세 운동을 모의하고, 밤마다 마을을 돌면서 장날에 일제히 봉기할 것을 권유하였다. 3월 16일 수천 명의 군중이 양손에 태극기를 들고 “대한 독립 만세”를 부르짖으며 시위 행진을 하였다. 군중들은 읍원정에 거점을 두고 면사무소[현 피향정], 태인주재소[현 태인파출소 자리]를 거쳐 성황산, 항가산 등지를 돌아 태인시장으로 이동하면서 만세를 불렀다. 일제 경찰은 돌발적인 사태에 적절한 대처를 하지 못하고 주재소 문 밖으로 나오지 못한 채 공포탄만 쏘았다. 시위 군중들은 주재소를 부수고 싶었으나 헌병들이 총을 난사하는 바람에 정면 충돌은 피할 수밖에 없었다. 날이 어두워지자 정읍시 태인면을 둘러싸고 있는 사방의 산에 올라가 봉화를 올리고 밤새 목이 쉬도록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고, “왜놈들은 물러가라” 하고 외치면서 석유를 묻힌 솜방망이에 불을 붙여 주재소 안으로 던지기도 하였다. 태인 독립 만세 운동으로 일제 헌병과 경찰에 검속된 인원은 총 80여 명에 달하였다. 그중에는 태인보통학교 훈도 김승호(金昇鎬), 곽장열, 정읍시 옹동면 면서기 송병옥 등도 있었다. 그중 송수연(宋洙淵)은 주모자라 하여 2년을, 김현곤[당시 태인면서기]은 1년 6개월을, 송한용은 10개월의 징역형을 언도받았다.
태인 독립 만세 운동의 주도 인물은 연령상 20대가 주류를 이루며, 30대는 구속된 인사 25명 가운데 3명에 불과하였다. 계층별로 볼 때는 이른바 ‘지식인’으로 불리는 보통학교 교사[훈도], 학생 혹은 졸업생, 면서기와 같은 하급 관리 그리고 노동자와 농민을 포함하는 층들이 다수였다.
[건립 경위]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일어난 정읍시 태인면 지방의 만세 운동을 기념하기 위하여 1984년 3월 1일 주민들의 자발적인 성금과 군비 보조 500만 원으로 세웠다.
[위치]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태인면 태성리 산33-6 성황산 자락에 있다.
[형태]
넓은 3층의 기단석 위에 높이 5m, 넓이 29.4 흉고 3.5m의 화강암으로 된 주탑을 세우고, 주탑 전면에 세로로 ‘삼일운동기념탑(三一運動紀念塔)’이라고 새겼다. 주탑 바로 옆 우측 하단부에 사각형 모양의 화강석을 만들어 그 안에 오석(烏石)을 끼워 넣었다. 오석에는 태인 3·1 독립 만세 운동을 찬양하는 헌시가 새겨져 있다. 뒷면에 새긴 내용은 잔악한 일제의 총검 하에서도 굴하지 않고 투쟁하였던 항일 정신을 길이 새기고 후손들에게 전승할 것을 잊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금석문]
태인 3·1운동 기념탑 뒤쪽 위패 봉안소 정면 중앙에는 둥근 오석 안에 다음과 같은 글씨를 새겼다.
“여기는 정읍인의 애국충정의 얼이 서린 곳. 구국일념으로 항일 투쟁에 몸 바치신 임들의 높은 충혼의 뜻을 기리고자, 성황산 기슭 양지 바른 이곳에 시민의 이름으로 위패를 봉안하니 해와 달이 이 언덕을 영원히 밝혀 주리라.”
오석을 중심으로 좌측에는 태인 3·1 독립 만세 운동에 가담하였던 송수연(宋洙淵), 김현곤(金鉉坤), 송문상(宋文相), 김달곤(金達坤), 신영식(辛泳湜), 송진상(宋鎭相), 송덕봉(宋德奉), 백낙두(白樂斗), 박지선(朴趾宣), 오석흥(吳錫興), 송영근(宋榮根), 백복산(白福山), 순으로, 우측에는 유치도(柳致道), 송근상(宋根相), 김부곤(金富坤), 오철수(吳澈洙), 김진근(金鎭根), 김용안(金龍安), 최민식(崔敏植), 김진호(金鎭浩), 김승권(金勝權), 송순용(宋順用), 윤상홍(尹尙弘), 권사옥(權士玉) 순으로 이름을 새겼다.
[현황]
태인 3·1운동 기념탑은 세월이 흘러 기념탑이 노후되자 2003년 12월 10일 탑을 복원하고, 순국선열 25위에 대한 위패 봉안소를 건립하여 매년 3·1절에 기념 행사 및 참배 의식을 거행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일제 강점기 엄혹한 시기임에도 이에 굴하지 않고 일제에 대항하였던 정읍시 태인면민들의 항일 정신을 기리고, 그러한 정신을 후대에 계승할 목적으로 주민들의 뜻과 정성을 모아 만세 운동의 현장에 기념탑을 세웠다는 데에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