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300441
한자 三·一運動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태인면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재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19년 3월 16일연표보기 - 태인 3·1운동 발생
발생|시작 시기/일시 1919년 3월 23일연표보기 - 정읍 3·1운동 발생
발생|시작 장소 태인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태인면 지도보기
발생|시작 장소 정읍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성격 독립운동
관련 인물/단체 이익겸|김진호|송한용|김현곤|송수연|박지선|15인회

[정의]

1919년 3월 전북특별자치도 정읍 지역에서 일어난 만세 시위 운동.

[개설]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의 3·1운동은 1919년 3월 16일 태인 장날에 김현곤(金玹坤)·송수연(宋洙淵)·박지선(朴址宣) 등의 주도로 발생하였다. 이어서 이익겸(李益謙)·박환규(朴桓奎) 등이 천도교와 기독교인들과 연대하여 1919년 3월 23일 정읍 장날을 기하여 만세 운동을 벌이기로 사전에 모의하였으나, 전날 일본 헌병대에 발각되어 시위가 좌절되었다.

[역사적 배경]

일제의 무단 통치로 크게 위축되었던 민족 지도자들은 제1차 세계 대전의 종전과 함께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제창한 민족 자결주의에 크게 고무되었다. 1919년 2월 8일 일본 도쿄에 있는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도쿄 유학생 200여 명이 모여 2·8독립선언식을 가졌고, 이에 영향을 받은 국내 민족 지도자들이 1919년 3월 1일 민족 대표 33인의 이름으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자주 독립을 선언하며 3·1운동을 전개하였다.

[경과]

1919년 3월 고종의 국장일에 참례하고자 태인 출신 김현곤·송수연·박지선 등 세 사람이 서울에 올라갔다가 3·1운동을 목격하고 태인으로 내려와 만세 시위를 벌이기로 결의하였다. 이후 송한용(宋漢鏞)·송진상(宋鎭相)·오석흥(吳錫興)·송영근(宋榮根)·김진호(金鎭皓)·유치도(柳致道)·김순곤(金淳坤)·송덕봉(宋德奉)·김진근(金鎭根)·백복산(白福山)·김용안(金龍安)·최민식(崔民植)·김부곤(金富坤) 등과 함께 15인회를 조직하고 각자 역할을 분담하였다.

송한용 등 15인은 거사 전까지 마을 사람 50여 명과 함께 김달곤(金達坤)의 집에서 만세 시위를 논의하고 밤마다 마을을 돌면서 음력 2월 보름날 일제히 봉기할 것을 권유하였다. 음력 2월 15일[양력 3월 16일]은 태인 장날이었다. 당시 태인면사무소 서기였던 김현곤은 태인면사무소의 등사판을 이용하여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등사하였다.

1919년 3월 16일 태인헌병분견소의 정오 종소리를 신호로 수천 명의 군중이 양손에 태극기를 들고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행진을 시작하였다 시위 군중은 태인 읍원정에 거점을 두고 면사무소[현 정읍 피향정], 태인주재소를 거쳐 성황산과 항가산 등지를 돌아 태인시장으로 이동하면서 만세를 불렀다. 일제 경찰은 적절한 대처를 하지 못하고 주재소 밖으로 나오지 못한 채 공포탄만 쏘아댔다. 시위 군중은 주재소를 때려 부수고 싶었으나 헌병들이 총을 난사하는 바람에 정면충돌은 피할 수밖에 없었다. 날이 어두워지자 태인을 둘러싸고 있는 사방의 산에 올라가 봉화를 올리고 밤새 목이 쉬도록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고, 왜놈들은 물러가라고 외치면서 석유를 묻힌 솜방망이에 불을 붙여 주재소 안으로 던지기도 하였다. 태인 3·1운동은 이후 열흘 가까이 산발적으로 지속되었다.

[결과]

태인 독립만세운동으로 정읍검사국에 피체된 인원은 총 25명이다. 주모자인 송수연은 징역 2년, 김현곤은 1년 6개월, 박지선은 6개월형을 언도받았다. 송한용송수연 등 연행된 사람들은 말로 표현할 수도 없는 심한 고문을 당하였고, 특히 박지선은 15인회 총무 직책을 맡았다는 이유로 6개월간 정읍헌병대 유치장에 갇혀 다른 동지들보다 유독 심한 고문을 당한 후에 재판을 받고 군산형무소에서 형기를 마치기도 하였다.

[의의와 평가]

태인 독립만세운동은 식민 통치의 말단 기관인 경찰 주재소와 면사무소 앞에서 공격적으로 시위를 하였다는 점과 시가지 시위에서 산상 시위로 형태를 바꿔 가면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전개되었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또한 태인 3·1운동은 이후에 송한용·박지선·김진호 등 시위 참여자들이 상해임시정부의 연락책과 연계하여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는 등 정읍 지역의 독립운동을 전개하여 나가는 계기로 작용하였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