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300541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유적/유적(일반)
지역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정촌2길 26[신정동 694]
시대 고대/삼국 시대
집필자 박노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이전 시기/일시 1973년 - 정해마을 우물 이전
이전 시기/일시 1994년 7월 - 정해마을 우물 이전 복원
개축|증축 시기/일시 2010년 4월 - 정해마을 우물 덮개 제작
현 소재지 정해마을 우물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정촌2길 26[신정동 694]지도보기
성격 우물
크기(높이,길이,둘레) 217㎝[가로]|217㎝[세로]

[정의]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신정동 정해마을에 예부터 있어 왔던 우물.

[개설]

정해(井海)마을은 풍수지리에 의하면 마을의 지형이 배[주(舟)]의 형국으로 가정에서 우물을 파면 배의 밑바닥에 구멍이 뚫리는 형태이고 배의 밑바닥에 구멍이 뚫리면 배가 침몰된다는 논리에 따라 근래까지 각 가정에 우물이 없었으며, 100여 가구의 큰 마을에서 생활용수를 한 우물에 의존하여 와서 ‘큰 새암’이라 불리었다고 한다. 우물 앞에 있는 「샘바다 우물 조성기」[2010년 4월 13일]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정해마을은 오랜 옛날부터 지형이 배의 형국으로 알려져 우물 파기를 삼가하고, 한 우물만 사용하여 왔다. 선지자 도선국사는 삼성산을 키[타(舵)]로 지목하여 정상 부근에 절을 지어 풍수비보를 꾀하였다. 이곳은 대동이 민족의 기운을 좌우하는 터로 우리나라 기맥을 보존하여서 기의 허를 막아 국운이 융창하기를 기원하는 뜻을 모아 샘바다 우물 덮개를 조성하였다.”

[건립 경위]

전설에 따르면 정해마을은 온통 바다였다. 산에서 수도하여 신통력을 얻은 여인이 정해마을을 지나다가 아름다운 산천경계에 감탄하여 “이런 곳에 마을이 하나 있으면 참 좋겠다. 어떤 가뭄에도 마르지 않을 시암도 하나 만들어 주고 가야겠다” 하며 내장산 망해봉에 올라 큰 바위 하나를 치마폭에 싸 가져다가 물기둥이 솟아오르는 이곳 한 가운데 돌을 던졌다. 순간 바닷물이 막히자 현재와 같은 분지 땅 정해마을이 생겨났다고 한다. 마을이 형성되면서 필요한 물을 공급받기 위하여 우물을 만들었다고 한다. 정촌마을에는 삼국 시대 정촌현의 치소가 있었다고도 한다. 그렇다면 마을은 늦어도 삼국 시대, 또는 삼국 시대 이전에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우물도 마을이 형성되면서부터 존재하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1973년 새마을 사업의 일환으로 마을 길을 포장하면서 원래 위치에서 오른쪽으로 약 5m 정도 이전하였다. 1994년 7월 원래의 위치로 복원하고 주변을 정비하였다.

[위치]

정해마을 우물은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정촌2길 26[신정동 694]에 있다. 정해마을 버스 승강장 옆에 정촌경로당이 있으며, 경로당 옆에 모정이 있고, 우물은 모정 옆에 있다.

[형태]

정해마을 우물은 긴 타원형으로 자연석과 흙을 이용하여 담장을 두르고 기와를 얹었다. 주변은 돌을 깔아 놓았으며, 샘에 빗물이 들이치지 않도록 지붕을 만들어 놓았다. 가운데에 정(井) 자 모양으로 돌을 쌓아서 우물을 만들었다. 우물 위에는 목재로 만든 덮개가 있으며, 덮개 위에는 두꺼비의 형상을 만들어 놓았다. 덮개 위에는 남북통일(南北統一), 국운융성(國運隆盛), 자손번영(子孫繁榮)이라고 새겨져 있다. 크기는 가로·세로 217㎝이다. 물은 흘러 넘쳐서 아래쪽으로 흘러 내려가도록 되어 있다.

[현황]

정해마을 우물은 2010년 4월 기존에 있던 우물 위에 덮개를 만들었다. 주변에 부부나무, 악수나무, 형제나무가 있다. 이 외에 탐진 안씨 비석 등이 있다. 정읍사 축제를 할 때에는 정해마을 우물에서 채수 의례로 축제의 시작을 알린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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