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3005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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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順天 朴氏 三綱門 |
이칭/별칭 | 박문효 정려,박관현 정려,박해상 처 여산 송씨 정려 |
분야 | 종교/유교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이평면 황토현로 445-43[오금리 1062-5]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노석 |
건립 시기/일시 | 181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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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소재지 | 순천 박씨 삼강문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이평면 황토현로 445-43[오금리 1062-5]![]() |
성격 | 정려각 |
양식 | 팔작지붕 |
정면 칸수 | 3칸 |
측면 칸수 | 1칸 |
소유자 | 순천 박씨 문중 |
관리자 | 순천 박씨 문중 |
[정의]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이평면 오금리에 있는 순천 박씨의 효행과 열행을 기리기 위한 조선 후기 정려.
[개설]
순천 박씨 삼강문(順天 朴氏 三綱門)은 1817년 명정된 순천 박씨 박문효(朴文孝), 1872년 명정된 박관현(朴琯鉉), 박해상(朴海相)의 부인 여산 송씨의 효행과 열행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효자 정려이다. 박문효[1568~1593]는 본관이 순천, 자는 백원(百源)이다. 고조할아버지는 박석명(朴錫命), 증조할아버지는 박거소(朴去疎), 할아버지는 중종반정을 주도한 박원종(朴元宗), 아버지는 박운(朴雲)이다. 외할아버지는 평산 신씨(平山 申氏) 진사 신후(申垕)이다. 박문효는 음직으로 종묘서직장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를 따라 의주까지 갔다가, 다음 해 서울로 돌아오다가 개성 송악산에서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하였다. 이러한 사실이 알려져 1817년(순조 17)에 아내 진천 송씨와 함께 정려가 내려졌다. 박문효와 진천 송씨는 서현사를 세워 뜻을 기렸으나 현재 서현사는 훼철되고 서현사지에 진천 송씨의 정려와 유허비만 남아 있다. 아들은 박충기(朴忠器)이다.
박관현[1767~1822]은 본관이 순천, 자는 중윤(仲允), 호는 연정(蓮汀)이다. 충신 박문효의 후손이며, 증조할아버지는 박시흥(朴始興), 할아버지는 박홍서(朴弘瑞), 아버지는 박기환(朴基桓)이다. 외할아버지는 한양 조씨(漢陽 趙氏) 조영봉(趙英鳳)이다. 박관현은 천성적으로 지극한 효성을 가지고 있어, 부모의 의견에 거슬리지 않았다. 어렸을 때 어머니가 병에 걸리자 백방으로 약을 구하였으며, 하늘에 기도하고 손가락을 찢어 피를 흘려 넣어 4일간 연명하게 하였다. 이에 사람들이 신(神)이 효에 감동하였다고 하였다. 상을 당하여서는 슬픔이 지나쳐 목숨이 위태로울 지경이 되기도 하였다. 묘소는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북면 복흥리 탑성마을에 있다. 장인은 전주 이씨(全州 李氏) 이정칠(李政七)이다. 아들은 효자로 이름난 박해두(朴海斗), 박해상(朴海相)[1788~1818], 박해신(朴海信)이다. 박해상의 아내 여산 송씨는 할아버지가 송명윤(宋命允), 아버지는 송휘술(宋彙述)이다. 성품이 맑았으며 부인으로서의 규범이 있었다. 시부모를 효성스럽게 섬기며, 남편을 예로써 대하였다. 남편이 병에 걸려 위독하여지자 서너 차례나 손가락을 잘라 피를 흘려 주기도 하였다. 남편이 죽었을 때에는 슬픔으로 여러 차례 기절하고, 3년 동안 궤연(几筵)[혼백이나 신위를 모신 자리와 그에 딸린 물건들]을 받들기를 거르지 않았다. 탈상하는 날에 따라 죽고자 하였으나, 어린 자식이 있어 따라 죽지 못하고 양육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이러한 사실이 알려져 1872년 명정을 받았다. 아들 박기동(朴箕東)은 큰아버지인 박해두(朴海斗)에게 입양되었다. 묘소는 답내 학산 아래에 있다.
[위치]
순천 박씨 삼강문은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이평면 황토현로 445-43[오금리 1062-5]에 있다. 이평면사무소에서 황토현로를 따라 덕천면으로 가다가, 대독마을 버스 승강장을 지나 400m 정도 가면 좌측으로 빠지는 샛길이 있다. 샛길을 따라 가면 제실이 나온다. 순천 박씨 삼강문은 제실 서쪽으로 약 30m 떨어진 곳에 있다.
[변천]
1817년 박문효에게 정려가 내려졌으며, 1872년 박관현, 박해상의 아내 여산 송씨에게 정려가 내려졌다.
[형태]
순천 박씨 삼강문의 원래 형태는 담장을 두르고 담장 중앙에 문을 만들었다. 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정면 3칸, 측면 1칸, 겹처마 팔작지붕의 정려가 있었다. 중앙 출입문에 ‘삼강문(三綱門)’이라고 쓰여 있었으며, 내부에는 3개의 현판이 있었다. 현판에는 ‘충신 증통정대부 이조참의 행증직대부 종묘서직장 박문효지려(忠臣 贈通政大夫 吏曹參議 行贈職大夫 宗廟署直長 朴文孝之閭)’와 ‘효자 학생 박관현지려(孝子學生朴琯鉉之閭)’, ‘열녀 학생 박해상 처 유인 여산 송씨지려(烈女 學生 朴海相 妻 孺人 礪山宋氏之閭)’라 쓰인 현판이 있었다.
[현황]
2023년 4월 현지 조사에서는 담장과 출입문은 무너진 상태였으며, 정려도 지붕이 많이 훼손되고 건물은 기울어졌으며 내부도 훼손된 상태였다. 현판은 남아 있지 않다.
[의의와 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