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300585 |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문헌/문서 |
지역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덕천면 동학로 742[하학리 56-1]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조광환 |
[정의]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덕천면 하학리 동학농민혁명기념관에 소장된 동학농민군 유광화가 동생에게 보낸 편지.
[개설]
동학농민군 유광화 편지는 1894년 늦가을, 동학농민군 유광화(劉光華)[1858~1894]가 고향 전라도 나주에 있는 동생 유광팔(劉光八)에게 인편으로 보낸 순 한문 편지이다. 유광화는 1858년 현 전라남도 나주시 다도면에서 통정대부를 역임한 유몽렬과 김해 김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명은 유재희(劉載熙)이고, ‘광화(光華)’는 유재희의 자이며, 호는 죽산(竹山)이다. 외세의 침탈로 인하여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유광화는 양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동학농민군이 되어 나주 지역을 근거로 활동하였다.
1975년 출간된 『강릉유씨대동보』에는 전라남도 남평·화순·동복에서 합세한 동학농민군이 일본군과 화순 일대에서 전투를 벌였고, 유광화는 1894년 12월 10일 전투에서 전사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동학농민군 유광화 편지는 전남대학교 이상식 교수에 의하여 1995년 6월 3일 『무등일보』에 처음 보도되었으며 편지 원본은 손자 유길홍이 보관하여 오다 2019년 유길홍의 아내 김순덕이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에 기증하여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덕천면 하학리의 동학농민혁명기념관에 전시되고 있다.
동학농민군 유광화 편지는 2021년 7월 1일 국가등록문화재 제811호로 지정되었으며,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보호법시행령」 고시에 따라 지정 번호가 삭제되어 국가등록문화재로 변경되었다. 2024년 5월 17일 국가유산청의 「국가유산기본법」 시행에 따라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바뀌었다.
[제작 발급 경위]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유광화는 36세였으며 다섯 살 아들과 갓 태어난 아들이 있었다고 전한다. 또한 휘하에는 700명의 동학농민군이 있었으며, 유광화는 군사 물자를 조달하는 책임을 지고 있었다. 동학농민군 유광화 편지의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유광화는 이미 수년 전부터 집을 나와 동학에 참여하였으며 나라가 위기에 처하면 백성은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노력하여야 하며 죽고 사는 것은 나라의 운명과 함께하여야 한다는 신념을 가진 유학자이자 실천적 지식인이었다.
또 동학농민군 유광화 편지를 보면 이전에도 동생 유광팔에게 재물을 부탁하여 조달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늘을 이불 삼고 땅을 자리 삼는 고초와 연달아 죽을 먹고 연명하는 유광화 자신과 동료들이 처한 상황을 차마 보지 못하여 염치를 불구하고 동생에게 또다시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던 절박한 심정을 느낄 수 있다.
[형태]
동학농민군 유광화 편지는 한지 1장짜리이며, 가로 24㎝, 세로 29㎝이다.
[구성/내용]
동학농민군 유광화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번사제광팔즉견(際煩舍弟光八卽見)[번거로운 인사말은 접어 두고 동생 광팔 보시게]
국가환난민지소환(國家患難民之所患)[나라가 환난에 처하면 백성도 근심해야 한다네]
여출가두핍어수년불고가사(余出家逗逼於數年不顧家事)[내가 집을 나와 수년을 떠돌아다니며 집안일을 돌보지 않았으니]
고연불사자도야(固然不似子道也)[자식 된 도리를 다하지 못한 것이네]
여광팔형대임제가위지행의(汝光八兄代任齊家爲之幸矣)[광팔이 자네가 형 대신 집안을 돌보고 있으니 다행이라 하겠네]
여지왜군누일전지(與之倭軍屢日戰之)[우리가 왜군과 더불어 오랫동안 싸운 것은]
소이보은지야(所以報恩之也)[나라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함이라네]
연이사세극난고(然而事勢極難故)[그러나 사세가 극히 어려워서]
천금지석지고초칙불가상야(天衾地席之苦楚則不可狀也)[하늘을 이불 삼고 땅을 자리 삼는 고초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네]
낭자견재다소요수지(囊者遣財多少要需之)[전에 보내 준 얼마간의 재물은 유용하게 썼다네]
근황극심어전고(近況極甚於前故)[근래 사정이 그전보다 어려워져]
경청전백차편(更請錢帛此便)[또 한 번 돈과 비단을 이 인편에 청하니]
통찰부송지(通察付送之)[살펴 보내 주길 바라네]
초미지급야(燋[焦의 오자인 듯]眉之急也)[매우 급한 일이라네]
갱갱망망(羹羹望望)[연달아 죽을 먹으며 부끄러워하네]
사생현명국운(死生縣命國運)[죽고 사는 것은 나라의 운명과 함께하는 것일세]
후사소탁어곤제(後事所託於昆弟)[뒷일은 동생에게 부탁하겠네]
총총불비례(摠摠不備禮)[예를 갖추지도 못했네]
갑오 만추 형 광화(甲午 晩秋 兄 光華)[갑오년 늦가을 형 광화]”
[의의와 평가]
동학농민군 유광화 편지는 동학농민혁명이 농민뿐만 아니라 양반층도 참여한 범민족적 혁명이었다는 점을 밝혀 주는 사료적 가치가 있다. 동학농민군의 일원이 전투 과정에서 직접 작성한 매우 희소한 편지 원본이라는 점에서도 가치의 중요성이 인정된다. 2023년 5월 24일, 동학농민혁명이 민중이 주체가 되어 자유, 평등, 인권의 보편적 가치를 지향하기 위한 역사적 사건으로 인정받아 동학농민군 유광화 편지를 비롯한 동학농민혁명 관련 기록물 185점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