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3006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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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丁克仁 |
영어공식명칭 | Jeong Geukin |
이칭/별칭 | 가택(可宅),불우헌(不憂軒),다헌(茶軒),다각(茶角)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칠보면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김영미 |
출생 시기/일시 | 140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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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429년 - 정극인 생원시 합격 |
활동 시기/일시 | 1437년 - 정극인 유배 |
활동 시기/일시 | 1453년 - 정극인 문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455년 - 정극인 전주부교수 사임 후 태인으로 낙향 |
활동 시기/일시 | 1469년 - 정극인 사간원정언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470년 - 정극인 낙향 |
몰년 시기/일시 | 1481년![]() |
추모 시기/일시 | 1630년 - 정극인 정읍 무성서원 배향 |
출생지 | 광주 두모포리 - 서울특별시 성동구 옥수동 |
거주|이주지 | 태인 고현동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칠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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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가|처가 | 태인 고현동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칠보면 |
묘소|단소 | 정극인 묘소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 산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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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당|배향지 | 무성서원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칠보면 원촌1길 44-12[무성리 500]![]() |
사당|배향지 | 율봉서원 - 전라남도 순천시 별량면 우산간동길 1-10[우산리 725-1] |
사당|배향지 | 안동사 - 전라남도 고흥군 포두면 길두리 |
성격 | 문신 |
성별 | 남성 |
본관 | 영광 |
대표 관직|경력 | 사헌부감찰|통례문통찬 |
[정의]
조선 전기 정읍 지역에 거주한 문신이자 문인.
[가계]
정극인(丁克仁)[1401~1481]의 본관은 영성(靈城)[영광(靈光)]이며, 자는 가택(可宅), 호는 불우헌(不憂軒)·다헌(茶軒)·다각(茶角)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정찬(丁贊)이고, 할아버지는 정광기(丁光起)이다. 아버지는 정곤(丁坤)이고, 어머니는 안정(安挺)의 딸 죽산 안씨(竹山 安氏)이다.
[활동 사항]
정극인은 1401년(태종 1) 경기도 광주 두모포리[현 서울특별시 성동구 옥수동]에서 태어났다. 1429년(세종 11)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며 이후 여러 번 과거 시험에 응시하였지만 번번이 떨어졌다. 1437년 세종이 흥천사(興天寺)를 중건하기 위하여 토목 공사를 하려고 하자 성균관 유생들과 함께 항소하다가 왕의 분노를 사서 북도(北道)로 귀양을 갔다. 이후 귀양에서 풀려난 정극인은 처향인 태인 고현동[현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칠보면]에 집을 짓고 당호를 ‘불우헌’이라고 하였다. 정극인은 불우헌 앞 비수천(泌水川) 주변에 송죽을 심고 농사를 지으며 향리의 자제들을 모아 가르쳤고, 향약계축(鄕約契軸)을 만들어 향리 교화에 힘썼다.
정극인은 1451년(문종 1) 광흥창부승에 제수되었고, 이어서 인수부승으로 있다가 1453년(단종 원년) 한성판관 성순조(成順祖)의 권유로 전시(殿試)에 응시하여 김수령방(金壽寧榜) 정과(丁科) 13명에 들었다.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전주부교수참진사로 있다가 사임하고 태인으로 돌아갔는데, 12월에 조정에서 인순부승록으로서 좌익원종공신 4등 녹권[공신의 훈공(勳功)을 새긴, 쇠로 만든 패]을 내렸다. 정극인은 다시 벼슬길에 나아가 10여 년간 네 번의 성균관주부와 두 번의 종학박사를 지냈고, 사헌부감찰 및 통례문통찬 등을 역임하였다. 1469년(예종 원년) 태인의 향교에서 교관으로 있다가 사간원으로 옮겨서 헌납과 정언을 지냈다. 불교를 배척하는 논의를 거듭하다가 옥살이를 하기도 하였으나 오래지 않아 풀려났다.
정극인은 1470년(성종 1) 나이가 많음을 이유로 관직에서 물러나 태인에서 후학 양성에 전념하였다. 1472년 향리의 자제들을 열심히 가르친 공로로 3품 산관(散官)이 내려졌다. 정극인은 1481년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정극인의 저술로는 시문집인 『불우헌집(不憂軒集)』 2권 1책이 전한다. 『불우헌집』 권1에는 35제 57수의 한시가 실려 있고, 권2에는 소(疏)·기(記)·서(序) 등 7편의 문(文)과 가곡(歌曲) 3편이 실려 있다. 가곡으로는 「불우헌가(不憂軒歌)」·「불우헌곡(不憂軒曲)」·「상춘곡(賞春曲)」이 문집 말미에 실려 있는데, 「상춘곡」은 작품 자체의 문학적 가치는 말할 것도 없고 사대부 가사의 시발점이 된다는 측면에서 문학사적인 의의도 인정받고 있다.
[묘소]
정극인의 묘소는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 산34에 있다. 묘소 아래에는 재실인 영모재가 건립되어 있다.
[상훈과 추모]
정극인은 사망한 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지금의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칠보면 원촌1길 44-12[무성리 500]에 있는 무성서원(武城書院)과 전라남도 순천시 별량면 우산간동길 1-10[우산리 725-1]에 있는 율봉서원(栗峰書院)에 배향되었다. 또한 전라남도 고흥군 포두면 길두리에 있는 안동사(雁洞祠)에도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