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3006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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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齊閔 |
영어공식명칭 | Gim Jemin |
이칭/별칭 | 사효(士孝),오봉(鰲峰),충강(忠剛)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송만오 |
출생 시기/일시 | 152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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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558년 - 김제민 진사시 합격 |
활동 시기/일시 | 1573년 - 김제민 문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586년 - 김제민 전라도도사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592년 - 김제민 의병장 추대 |
몰년 시기/일시 | 1599년![]() |
추모 시기/일시 | 1674년 - 김제민 도계서원 배향 |
추모 시기/일시 | 1829년 - 김제민 이조판서 추증 |
출생지 | 부안 옹정 - 전북특별자치도 부안군 부안읍 옹중리 |
거주|이주지 | 고부 저교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덕천면 도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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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 | 김제민 묘소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덕천면 우덕리 7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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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문신|의병장 |
성별 | 남성 |
대표 경력 | 전라도도사 |
[정의]
조선 전기 정읍에 거주한 문신이자 의병장.
[가계]
김제민(金齊閔)[1527~1599]의 본관은 의성(義城)이며, 자는 사효(士孝), 호는 오봉(鰲峰)이다. 증조할아버지는 김운추(金運秋)이고, 할아버지는 김부현(金溥賢)이다. 아버지는 김호(金灝)이고, 어머니는 김석옥(金錫沃)의 딸 부령 김씨(扶寧 金氏)이다. 부인은 김윤구(金潤球)의 딸 김해 김씨(金海 金氏)이고, 아들은 김서(金曙)·김엽(金曄)·김흔(金昕)·김안(金晏)이다.
[활동 사항]
김제민은 1527년(중종 22) 부안 옹정(甕井)[현 전북특별자치도 부안군 부안읍 옹중리]에서 태어나 일곱 살이던 1533년부터 고부(古阜)의 저교(沮橋)[현 정읍시 덕천면 도계리]로 옮겨 살았다. 이항(李恒)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1558년(명종 13) 진사시에 합격하고 1573년(선조 6) 식년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후 형조의 낭관(郎官)을 거쳐 화순현감, 순창군수를 역임하고 1586년 전라도도사로 부임하였지만 병으로 사퇴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선조(宣祖)가 의주로 몽진하였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김제민은 전라도 내의 각 고을에 의병을 모집하는 격문을 보냈다. 이에 호응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삼례(參禮)로 모였고, 김제민은 의병장으로 추대되었다. 이후 김제민 의병 부대는 북상하는 왜군을 맞아 권율(權慄) 휘하의 관군과 함께 대둔산 아래 이치(梨峙)에서 전투를 치렀다. 이치 전투에서 김제민은 아들 한 명을 잃었지만 파죽지세이던 왜군의 진격 속도를 다소 늦출 수 있었다. 이후 김제민은 아들 김흔 등에게 군량을 모아 선조가 머물고 있는 의주의 행재소에 전달하도록 한 뒤 향리로 돌아와 새로운 의병진을 구성하였고, 이후 왜군과의 여러 싸움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전쟁이 어느 정도 소강상태에 접어들자 김제민은 향리에 도계서당(道溪書堂)을 짓고 후진 양성과 학문 연구에 힘쓰다가 1599년 사망하였다.
[저술 및 작품]
김제민의 저술로는 문집인 『오봉유고(鰲峰遺稿)』 3권 3책이 전한다.
[묘소]
김제민의 묘소는 정읍시 덕천면 우덕리 700-1에 있다.
[상훈과 추모]
김제민은 1674년(현종 15) 지금의 정읍시 덕천면 도계1길 34-13[도계리 464]에 있는 도계서원(道溪書院)에 배향되었고, 1829년(순조 29)에는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강(忠剛)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