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3006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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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許樑 |
영어공식명칭 | Lee Huryang |
이칭/별칭 | 경언(擎彦)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송만오 |
출생 시기/일시 | 156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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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597년 - 이허량 정유재란 때 의병 봉기 |
몰년 시기/일시 | 1597년 9월 16일![]() |
추모 시기/일시 | 1623년 - 이허량 통정대부 추증 |
출생지 | 정읍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
거주|이주지 | 정읍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
묘소 | 이허량 묘소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쌍암동 월영마을![]() |
성격 | 의병 |
성별 | 남성 |
[정의]
조선 후기 정읍 출신의 의병장.
[가계]
이허량(李許樑)[1567~1597]의 본관은 봉산(鳳山)이며, 자는 경언(擎彦)이다. 할아버지는 이정인(李貞仁)이고, 아버지는 종사랑 이민효(李敏孝)이다. 부인은 유희저(柳希渚)의 딸 고흥 유씨(高興 柳氏)이고, 이들은 이지웅(李之雄)이다.
[활동 사항]
이허량은 1567년(명종 22) 정읍에서 태어났다. 기정진(奇正鎭)이 쓴 부인 고흥 유씨 정려기에 따르면, 이허량은 효심이 깊고 장부로서의 지조와 절개가 곧았다고 한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이 발발하고 왜군이 정읍 근처인 사현(沙峴)에 이르러 온갖 만행을 저지르자 이허량은 분개하여 향리의 청년들과 함께 의병을 결성하였다. 이후 진격하여 온 왜군에 맞서 싸우며 수십 명을 처단하였지만 중과부적으로 9월 16일 전사하였다.
이허량이 사망하던 날 부인 유씨도 함께 있었는데, 왜군이 겁탈하려고 하자 크게 꾸짖으며 스스로 목숨을 끊어 남편의 뒤를 따랐다. 이허량과 부인 유씨의 시신은 가동(家僮)들이 거두어 정읍현 동쪽에 있는 불각산(佛覺山)에 묻어 주었다고 한다.
[묘소]
이허량의 묘소는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쌍암동 월영마을에 있다.
[상훈과 추모]
이허량은 1623년(인조 1) 통정대부에 추증되었고, 부인 고흥 유씨도 숙부인에 추증되었다. 정읍시 월영2길 27[쌍암동 560-1]에 이허량 부부에게 내린 봉산 이씨 충열려가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