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3006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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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白光彦 |
영어공식명칭 | Back kwangun |
이칭/별칭 | 풍암(楓巖),충민(忠愍)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송만오 |
출생 시기/일시 | 155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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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573년 - 백광언 무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589년 - 백광언 북청판관 역임 |
몰년 시기/일시 | 1592년![]() |
추모 시기/일시 | 1834년 - 백광언 시호 충민 추시 |
출생지 | 태인현 도동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옹동면 칠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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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지 | 용인 - 경기도 용인시 |
성격 | 무신 |
성별 | 남성 |
대표 경력 | 고성현령|북청판관 |
[정의]
조선 전기 정읍 출신의 무신.
[가계]
백광언(白光彦)[1554~1592]의 본관은 해미(海美)이며, 호는 풍암(楓巖)이다.
[활동 사항]
백광언은 1554년(명종 9) 태인현 도동(道洞)[현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옹동면 칠석리]에서 태어났다. 1573년(선조 6) 무과에 급제한 후 진해현감과 고성현령을 역임하였다. 1589년 함경도의 북청판관으로 근무하던 중에는 길주(吉州)로 귀양 가는 조헌(趙憲)을 극진하게 대접하기도 하였다.
1592년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고향 태인에 머물고 있던 백광언은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가 의주로 피난하였다는 소식을 듣자 전덕린(全德麟) 등과 함께 의병을 조직하였다. 이후 전주(全州)로 가서 전라도관찰사 겸 순찰사이던 이광(李洸)의 조방장이 되었고, 선봉장 이지시(李之詩)와 함께 북으로 진격하여 경기도 용인(龍仁)에서 왜적과 전투를 벌이다가 전사하였다.
[상훈과 추모]
백광언은 사망한 뒤 병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1666년(현종 7) 지금의 정읍시 옹동면 산성리 649-1에 있는 모충사(慕忠祠)에 배향되었다. 1834년(순조 34)에는 충민(忠愍)이라는 시호를 하사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