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30066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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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崔永斗 |
영어공식명칭 | Choe Yeongdu |
이칭/별칭 | 최병규(崔丙圭),최인기(崔仁基)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조광환 |
출생 시기/일시 | 182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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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894년 - 최영두 동학농민혁명 참여 |
활동 시기/일시 | 1899년 4월 18일 - 최영두 기해농민봉기 주도 |
활동 시기/일시 | 1899년 4월 22일 - 최영두 관군에 체포 |
몰년 시기/일시 | 1899년 9월 13일![]() |
출생지 | 만화동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입암면 하부리 만화마을![]() |
거주|이주지 | 만화동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입암면 하부리 만화마을 |
활동지 | 정읍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
성격 | 기해농민봉기 지도자 |
성별 | 남성 |
본관 | 초계 |
[정의]
개항기 정읍 출신의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이자 기해농민봉기 지도자.
[가계]
최영두(崔英斗)[1829~1899]의 본관은 초계(草溪)이고, 아버지는 최정도(崔禎道)이다. 본명은 최병규(崔丙圭)이고, 최인기(崔仁基)로도 알려졌다. ‘영두(永斗)’는 자이다. 부인은 언양 김씨(彦陽 金氏)이고, 아들은 최석일[최익서]·최석안[최방서]·최석정·최석홍이다.
[활동 사항]
최영두는 1829년(순조 29) 정읍현 서일면 만화동[현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입암면 하부리 만화마을]에서 태어났다. 1894년(고종 31) 아들 최익서·최방서와 함께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뒤 살아남아 피신하였다가 기해농민봉기를 이끌었다. 기해농민봉기는 1894년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다가 살아남은 손화중포와 김개남포에 속한 동학농민군들이 제2의 동학농민혁명을 계획하고 이를 실행에 옮긴 사건이었다.
최영두는 1899년 4월 18일 아들 최익서와 함께 정읍현 입암면 왕심리[현 정읍시 입암면 단곡리 왕심마을]에서 300여 명의 농민군을 모아 보국안민(輔國安民)·벌왜벌양(伐倭伐洋)을 기치로 봉기하였다. 최익서는 박정집(朴正執) 등 32명을 거느리고 고부 관아를 습격하였고, 서양 총 11자루와 천보총(千步銃) 15자루, 조총(鳥銃) 150자루와 화약 2상자 등의 무기를 확보하여 농민군을 무장시켰다. 이후 최익서가 이끈 300여 명의 농민군은 1899년 4월 21일 흥덕(興德)·무장(茂長)을 점령하고 4월 22일 고창성(高敞城)[현 전북특별자치도 고창군 고창읍]으로 진격하여 전투를 벌였으나 관군에게 패배하였다.
최영두는 나머지 농민군을 이끌고 전투에 참여하기 위하여 무장을 떠나 고창으로 향하였지만, 폭우로 발이 묶인 사이 최익서의 부대가 패전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농민군을 해산한 뒤 정읍으로 돌아왔다. 최영두는 둘째아들 최방서와 함께 관군에게 체포되어 전주 감옥에 투옥되었고, 9월 13일 감옥에서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