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3006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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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柳宗汝 |
영어공식명칭 | Yu Jongyeo |
이칭/별칭 | 유종여(柳琮汝),유종여(柳鍾汝),유창호(柳昌鎬)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장순순 |
[정의]
개항기 정읍 출신의 의병장.
[활동 사항]
유종여(柳宗汝)[?~1909]의 본관은 고흥(高興)이며, 아버지는 유제한이다. 1907년 7월 일제가 헤이그 특사 파견에 대한 책임을 물어 고종 황제를 퇴위시키고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을 체결하여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하자, 해산 군인·유생·평민들이 참여하는 후기 의병 항쟁이 전국에서 거세게 일어났다. 정읍 지역에서도 김영백(金永伯)·이성화(李成化)·박춘화(朴春化)·신보현(申甫鉉) 등이 의병을 일으켜 활동하였고, 유종여도 의진을 조직하여 1907년 11월 무렵부터 전라북도 순창(淳昌)·태인(泰仁)과 전라남도 담양(潭陽)·장성(長城)·광주(光州) 등지에서 대일 항쟁을 전개하였다.
유종여는 1908년 2월 말부터 순창군과 장성군 일대에서 부대원 약 60명을 이끌고 활동하였으며, 1908년 11월에는 부하 80여 명과 함께 총기 20정을 휴대하고 전라남도 담양군 월산면 월산리 이 모(某)의 가택을 침입하여 엽전 300냥을 군자금으로 빼앗았다. 또한 순창·담양·광주에서 부대원 30여 명과 함께 식량 등 군수품을 모집하였고, 담양군 용면 추월산(秋月山)에서 광주수비대 야마다[山田] 소위가 이끄는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1909년 2월에는 부하 20여 명과 함께 담양군 용면 원치에서 이장을 총으로 위협하여 군자금으로 엽전 70냥을 확보하였고, 순창군 복흥면 어은동[현 전북특별자치도 순창군 복흥면 어은리] 동장 김만복(金萬福)의 집에 들이닥쳐 군자금으로 엽전 100냥을 빼앗았다. 유종여는 이후에도 계속 의병 항쟁을 이어 나가다가, 1909년 5월 8일 순창군 쌍치면 학선리 오룡촌(五龍村)에서 일본군과 교전 중 사망하였다. 유종여는 유종여(柳琮汝)·유종여(柳鍾汝)·유창호(柳昌鎬)로도 알려졌다.
[묘소]
유종여의 묘소는 대전광역시 유성구 현충원로 251[갑동 산23-1] 국립대전현충원에 있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유종여의 공적을 기려 200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