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3007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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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柳滿圭 |
영어공식명칭 | Yu Mangyu |
이칭/별칭 | 상삼(庠三),운천(雲川)l유만규(柳萬奎)l유만규(柳滿奎)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내장동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장순순 |
[정의]
일제 강점기 정읍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유만규(柳滿圭)[1886~1956]의 본관은 고흥(高興)이며, 자는 상삼(庠三), 호는 운천(雲川)이다. 독립운동가 유학규(柳學圭)가 사촌 형이다. 유만규(柳萬奎) 또는 유만규(柳滿奎)로도 알려졌다.
[활동 사항]
유만규는 1886년 4월 26일 전라북도 정읍군 내장면 금명리[현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내장상동]에서 태어났다. 1908년 11월부터 1920년 3월까지 세 차례에 걸쳐 사촌 형 유학규에게 상해임시정부에 전달할 독립운동 자금 5,000원을 건넸다. 유만규가 제공한 독립운동 자금은 1920년 2월 임시정부 요원으로 서울에 나와 있던 조한옥(趙漢鈺)에게 전달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국내에 조직을 만들고 전국 13개 도에 선정사(宣政使), 군과 면에 관장(管長)을 두었는데 유만규는 전라북도 흥덕군(興德郡)[현 전북특별자치도 고창군 흥덕면 일대] 관장으로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1921년 3월에는 임시정부 재무총장 이시영(李始榮) 명의의 독립운동비 모집의뢰장과 독립공채(獨立公債)를 유학규와 함께 교부받고 상해임시정부의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였다.
유만규는 1921년 5월 20일 유학규·김정술(金廷述)·어대선(魚大善)·이중혁(李重赫) 등과 함께 독립공채 사건[일명 구국단 사건]으로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고, 1922년 3월 3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제령(制令) 제7호 위반으로 심리를 받았으나 무죄로 방면되었다.
유만규는 정읍에서 군산부[현 전북특별자치도 군산시]로 이사한 후에는 고향인 내장면 내의 공공 사업에 많은 물질적 후원을 하였으며, 1956년 9월 1일 사망하였다. 『매일신보』 1936년 11월 18일 자에는 유만규가 소방조(消防組) 설치에 300원, 경비 전화 가설에 1,000원, 내장공립보통학교[현 내장초등학교] 신축에 1,000원, 내장면 경찰관 주재소 신축에 800원을 기부하였으며, 심한 재해를 입은 내장면 지역에서 자신의 토지를 경작하는 소작인들에게 많은 배려를 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당시 내장면 주민들이 유만규의 공덕을 기려 세운 석비가 현재 내장초등학교 안에 있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유만규의 공적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2008년 8월 15일 정읍 지역 인사들이 1905년 친목 도모를 위하여 창립한 노휴재(老休齋)에서 애국지사 이익겸·박환규·유만규 항일운동 공적비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