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3007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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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柳學圭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북면 승부리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정원기 |
출생 시기/일시 | 1888년 9월 1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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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20년 11월 - 유학규 임시정부에서 정읍군 관장 임명 |
몰년 시기/일시 | 1949년 3월 2일![]() |
추모 시기/일시 | 1987년![]() |
추모 시기/일시 | 1990년![]() |
출생지 | 승부리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북면 승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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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정의]
일제 강점기 정읍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유학규(柳學圭)[1888~1949]는 1888년 9월 11일 지금의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북면 승부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고흥(高興)이다. 할아버지는 감역(監役) 유한상(柳漢相)이며, 아버지는 찰방(察訪) 유연직(柳然稷)이다.
[활동 사항]
유학규는 영릉참봉(永陵參奉)의 관직을 지낼 만큼 유교적 기본 소양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대한제국의 경제적 독립을 위하여 국채 보상 의연금을 납부하며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였으며, 일제에게 국권을 빼앗긴 이후에는 윤철(尹喆)·김정술(金廷述) 등과 함께 구국단 활동에 참여하였다. 상해임시정부에서 파견한 조한호(趙漢鎬)가 1919년 10월 윤철에게 독립 자금 지원을 부탁하자, 유학규는 윤철과 뜻을 같이하여 독립운동 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여 나갔다.
유학규는 6촌 유만규(柳滿圭)를 독립운동 자금 모집에 참여하도록 독려하였다. 유만규는 독립운동 자금으로 1919년 11월부터 1920년 2월까지 총 3회에 걸쳐 5,000원의 의연금을 유학규에게 건네주었다. 유학규는 받은 의연금을 윤철·김정술 등에게 건네주었고, 독립운동 자금은 다시 상해임시정부 요원인 조한호를 통하여 임시정부에 전달되었다.
1920년 8월에는 임시정부에서 고일정(高一政)이 내무총장 이동녕(李東寧)과 최창식의 소개장을 가지고 윤철을 찾아왔다. 윤철은 고일정이 가지고 온 행정 조직서에 따라 각 도에 선정사(宣政使)를, 각 군과 면에는 관장(管長)을 설치하여 조직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 1920년 11월 유학규를 정읍군 관장, 유만규를 흥덕군 관장에 임명하고 점차 지방 행정 조직을 완성하여 나갔다.
윤철과 이태훈은 독립운동 자금 모집과 공산주의 사상 전파를 위하여 ‘노농회(勞農會)’라는 소농민 단체를 조직하여 일제의 억압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였다. 윤철과 이태훈은 김정술·이동식(李東植)·이장용(李璋容)과 협의하여 전라·충청·경상도 지역의 소농을 조사하여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이런 소식이 전하여지자 정읍 지역과 경북 고령군 농민들은 해당 지역에서 노농회가 발족하면 입회하겠다는 뜻을 밝히기도 하였다. 유학규는 노농회 활동 및 임시정부 활동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기 위하여 토지 2만 평[약 6만 6115㎢]을 저당 잡히고 4,000원을 임시정부에 보냈다. 하지만 유학규가 토지를 저당으로 돈을 융통하는 과정에서 경기도 경찰부에 발각되어 주요 인물들이 독립운동 자금 모집과 노농정부 건설 협의로 체포되었다. 유학규는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 형을 선고 받았다. 유학규는 1949년 3월 2일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유학규의 공적을 기려 1987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