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3007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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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益謙 |
영어공식명칭 | Yi Ikgyeom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정원기 |
[정의]
정읍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이익겸(李益謙)[1879~1928]은 1879년 9월 7일 지금의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내장상동에서 태어났다. 1907년 9월 대한매일신보 정읍지사를 개소하고 지국장을 맡아 운영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 전국으로 확산되자 정읍 지역에서도 김현곤(金炫坤)·송수연(宋洙淵) 등이 중심이 되어 3월 16일 태인 장날에 만세 시위가 전개되었다. 이익겸은 김회근(金會根)·박환규(朴桓奎) 등과 함께 3월 23일 정읍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정읍 지역 기독교·천도교인들을 동원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하지만 3월 22일 거사 계획이 발각되어 이익겸과 박환규는 정읍 헌병분대에 체포되고 준비해 두었던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는 압수되었다. 이익겸은 1919년 5월 15일 전북지방법원 정읍지청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8월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익겸은 출소 후 정읍청년회와 정읍노동조합에 참여하면서 지역 내 청년과 노동자들의 상황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1923년에는 정읍노농연합회 위원장으로 취임하면서 정읍 지역 내 일본인 자본가 계급에 맞서서 노동자·농민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한 활동 및 소작인들의 처우 개선에 힘을 쏟았다. 1927년 4월 13일 신간회 정읍지회 창립 발기인 대회에 참석하였고, 이후 지회장에 선출되어 신간회 활동을 전개하다가 1928년 3월 16일 사망하였다.
[묘소]
이익겸의 묘소는 대전광역시 유성구 현충원로 251[갑동 산23-1]에 있는 국립대전현충원에 있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이익겸의 공적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이익겸은 2021년 정읍시에서 ‘9월의 정읍 역사 인물'로 선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