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3007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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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羅容均 |
영어공식명칭 | Na Yonggyun |
이칭/별칭 | 백봉(白峰)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영원면 운학리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임혜영 |
출생 시기/일시 | 189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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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시기/일시 | 1917년 10월 - 나용균 와세다대학 입학 |
수학 시기/일시 | 1919년 - 나용균 와세다대학 수료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 나용균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 |
활동 시기/일시 | 1921년 - 나용균 국민대표회주비회 조직 |
활동 시기/일시 | 1923년 - 나용균 영국 유학 |
수학 시기/일시 | 1923년 - 나용균 영국 런던대학 수학 |
활동 시기/일시 | 1927년 - 나용균 귀국 |
활동 시기/일시 | 1948년 - 나용균 제헌국회의원 당선 |
활동 시기/일시 | 1960년 - 나용균 보건사회부 장관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963년 - 나용균 국회부의장 취임 |
활동 시기/일시 | 1977년![]() |
몰년 시기/일시 | 1984년![]() |
추모 시기/일시 | 1990년![]() |
출생지 | 운학리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영원면 운학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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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수학지 | 와세다대학 - 일본 도쿄시 |
학교|수학지 | 런던대학교 - 영국 런던시 |
활동지 | 상하이 - 중국 상하이시 |
묘소 | 서울 현충원 - 서울특별시 동작구 현충로 210[동작동 산 41-2]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성 |
대표 경력 |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의원|보건사회부 장관|국회부의장 |
[정의]
일제 강점기 정읍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나용균(羅容均)[1895~1984]의 본관은 나주(羅州)이고, 호는 백봉(白峰)이다. 할아버지는 나정집(羅正集)이고, 아버지는 나도진(羅燾珍)이다.
[활동 사항]
나용균은 1895년(고종 32) 11월 25일 지금의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영원면 운학리에서 태어났다. 1914년 일본 도쿄로 유학하여 1917년 10월 와세다[早稻田]대학 고등예과 정치과에 입학하였다.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변화하는 국제 정세에 주목하다가 1919년 2월 8일 백관수(白寬洙)·김도연(金度演) 등 도쿄 유학생들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였다. 독립 선언 후에는 상하이로 망명하였고,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수립 초창기에 왕성한 활동과 성과를 보이다가 1921년에 들어서면서 점차 쇠락하자 이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움직임으로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하고 국민대표회기성회를 조직하였는데, 나용균은 조직 임원 20명 중 한 사람으로 선출되었다. 국민대표회의 준비에 힘쓰던 나용균은 1922년 국민대표회주비위원회의 서기를 맡아서 「국민대표회주비위원회 선언서」를 작성하였다. 선언서에서 “본 주비회는 시세의 추세와 민중의 요구에 응하여 과거의 모든 분규와 착잡한 문제를 해결하고 미래의 완전 확실한 방침을 수립하여 우리의 독립운동이 재차 통일적, 조직적으로 진행하도록 하는 양대 안건하에 국민대표회 소집 사항도 준비하고 책임을 부담하여 성립한 것”임을 밝혔다.
나용균은 국민대표회의가 별다른 성과 없이 끝나자 1923년 영국으로 유학을 떠나 런던대학에서 수학하였고, 미국을 거쳐 1927년 귀국한 후에는 영농 활동에 종사하였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인 1948년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되었고, 1960년에는 보건사회부 장관에 임명되었다. 1963년부터 1965년까지 국회부의장을 역임하였다.
[묘소]
나용균의 묘소는 서울특별시 동작구 현충로 210[동작동 산41-2]에 국립서울현충원에 있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나용균의 공적을 기려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