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300729
한자 滿空
이칭/별칭 송도암(宋道巖),월면(月面)
분야 종교/불교
유형 인물/종교인
지역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이경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71년 3월 7일연표보기 - 만공 출생
활동 시기/일시 1895년 - 만공 봉곡사에서 수행
활동 시기/일시 1914년 - 만공 간월암 건립
활동 시기/일시 1935년 5월 - 만공 마곡사 주지로 추대
몰년 시기/일시 1946년 10월 20일연표보기 - 만공 사망
활동지 천장사 - 충청남도 서산시 고북면 천장사길 100[장요리 1]
활동지 수덕사 -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수덕사안길 79[사천리 19]
활동지 전월사 -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사천리 산2
성격 승려
성별
대표 경력 조선불교선학원종무원 종정

[정의]

일제 강점기 정읍 출신의 승려.

[가계]

만공(滿空)[1871~1946]은 1871년(고종 8) 3월 7일 전북 태인[현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에서 태어났다. 속명은 송도암(宋道巖)이며, 법호는 만공, 법명은 월면(月面)이다. 아버지는 송신통(宋神通)이다.

[활동 사항]

만공은 충청남도 서산 천장사에서 태허(泰虛)를 은사로 모시고, 경허(鏡虛)를 계사로 하여 사미계를 받았다. 1895년 온양 봉곡사에서 수행한 후 덕숭산 수덕사와 정혜사·견성암을 거쳐 금강산 유점사에서 3년을 지냈다. 1901년 양산  통도사 백운암에서 새벽 범종 소리에 크게 깨달음을 이루었다. 1904년 세상에 나아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북녘으로 향하던 승려 경허를 서산 천장암에서 만나 전법게와 법호 ‘만공’을 받았다. 1905년 덕숭산으로 다시 돌아와 수덕사에 금선대(金仙臺)를 짓고 참선하며 수행승들을 가르쳤으며, 1914년 서산 간월도리에 간월암이라는 암자를 세웠다. 1933년부터 유점사 금강선원과 마하연 선원 조실을 지냈으며, 1935년 5월 마곡사 주지로 추대되었다.

만공은 수덕사, 정혜사, 견성암, 간월암을 중창 또는 복원하였다. 1920년대 초에는 선학원 설립 운동에 참여하고, 1930년대 중반 조선불교선학원종무원 종정을 지내는 등 일본 불교에 맞서 조선 불교의 정체성 확립에 앞장섰다. 말년에는 덕숭산 상봉 근처 전월사에 머물며 선풍을 일으켰다. 1946년 10월 20일 원적에 들었다.

[사상과 저술]

만공은 존재의 본체를 마음, 자성, 불성, 여여불, 허공, 주인공, 본래면목, 자심, 동그라미 등으로 표현하였다. 개인의 참된 본질이 우주 만물의 본체와 하나라는 뜻이다. 불교의 진수는 이 마음을 깨닫는 데 있고 인간의 가치 있는 삶도 이 깨달음을 성취함으로써 찾아진다고 보았다. 이론과 사변을 철저히 배제하고 무심의 태도로 화두를 참구(參究)하는 간화선법을 채택하였고, 제자들에게는 항상 무(無) 자 화두를 참구하도록 하였다. 만공은 수도승들에 대한 지도 방법으로 침묵 또는 방망이질[棒], 할(喝), 격외(格外)의 대화 등 여러 방법을 자유자재로 사용하였다. 만공의 지도 방법은 임제종풍(臨濟宗風)을 계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만공의 제자는 비구 보월(寶月)·용음(龍吟)·고봉(高峰)·금봉(錦峰)·서경(西耕)·혜암(惠庵)·전강(田岡)·금오(金烏)·춘성(春城)·벽초(碧超)·원담(圓潭)과 비구니 법희(法喜)·만성(萬性)·일엽(一葉) 등이 있다. 만공의 사후에 『만공어록(滿空語錄)』이 편찬되었다.

[묘소]

만공의 진영(眞影)은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사천리 정혜사 금선대와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학봉리 동학사 조사전 등에 있다.

[상훈과 추모]

만공은 덕숭산에서 다비하였으며, 유골을 모신 부도[만공탑]를 덕숭산 금선대 근처에 세웠다. 만공의 진영은 경허의 진영과 함께 금선대에 봉안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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