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3007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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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趙哲濟 |
영어공식명칭 | Jo Cheolje |
이칭/별칭 | 정산(鼎山),조천자(趙天子) |
분야 | 종교/신종교 |
유형 | 인물/종교인 |
지역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태인면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안후상 |
출생 시기/일시 | 189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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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09년 - 조철제 만주 이주 |
활동 시기/일시 | 1918년 - 조철제 무극도 창시 |
활동 시기/일시 | 1925년 - 조철제 무극도에서 무극대도로 개칭 |
활동 시기/일시 | 1950년 - 조철제 태극도로 교명 변경 |
몰년 시기/일시 | 1958년 3월![]() |
출생지 | 경상남도 함안군 칠서면 회산리 - 경상남도 함안군 칠서면 회산리 회문동 |
활동지 | 태인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태인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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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종교인 |
성별 | 남 |
[정의]
일제 강점기 정읍 지역에서 활동한 종교인이자 무극도의 창시자.
[가계]
조철제(趙哲濟)[1895~1958]의 호는 정산(鼎山)이며, 조천자(趙天子)라고도 불렸다. 아버지는 조용모(趙鏞模)이다.
[활동 사항]
조철제는 1895년 지금의 경상남도 함안군 칠서면 회산리 회문동에서 태어났다. 1909년 항일운동을 하던 아버지 조용모를 따라 만주 봉천으로 이주한 뒤 항일 구국 운동에 가담하였다. 이후 도력(道力)으로써 구국제세(救國濟世)할 뜻을 정하고 입산수도에 들어갔으며, 1917년에 강증산(姜甑山)의 대도(大道)를 깨닫고 득도하였다고 한다.
조철제는 1917년 귀국하여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다가 1918년 지금의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태인면 태흥리에서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때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고, 1918년에는 ‘무극도(無極道)’라는 교단을 창시하고, 1925년에는 ‘무극대도’로 교명을 고쳤다. 당시 무극도는 인근의 보천교(普天敎)와 세를 겨룰 정도였다고 한다.
무극도는 1925년 ‘진업단(進業團)’이라는 교인 단체를 조직하여 충청남도 안면도와 원산도에서 간척 공사를 시작하여 안면도에 20여 만 평의 농경지를 조성하고, 원산도에 대규모 염전을 조성하였다. 교인 400여 명을 파견하여 평안북도 무산의 국유림을 벌채하였으며, 전라북도 완주군 이서면의 사금광과 충청북도 음성군의 무극광산을 개발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조성한 재정을 바탕으로 무극도는 식민지 치하에 굶주리는 지역 빈민들을 구제하는 사업을 전개하였다. 1936년 일제는 보천교 등 한국 신종교의 활동을 전면 금지하였는데, 무극도 역시 이때 강제 해산되었다. 1941년에는 교단 본부 건물까지 전면 훼철되었다.
1945년 광복이 되어 종교 활동을 다시 시작한 조철제는 1948년에 교단 본부를 부산광역시 중구 보수동으로 옮겼고, 1950년에는 교명을 ‘태극도(太極道)’라 하였다. 1955년에 교단 본부를 부산시 감천동으로 옮겼고, 이때 약 3,000세대, 1만여 명이 교단 본부를 따라 이주하면서 감천동은 대규모 도인촌이 되었다. 1958년 3월 조철제는 수제자 박한경(朴漢慶)에게 종통을 전하고 사망하였다. 박한경은 1968년까지 태극도를 이끌다가 이듬해인 1969년에 서울특별시 광진구 중곡동에서 종단 대순진리회(大巡眞理會)를 창설하였다.
[사상과 저술]
조철제로부터 비롯된 무극도와 태극도의 교리는 증산 사상에 기초를 두면서도 음양합덕(陰陽合德), 신인조화(神人調化), 해원상생(解冤相生), 도통진경(道通眞境)을 종지로 한다. 그리고 안심·안신·경천·수도의 4강령과 성·경·신을 3요체로써 신조(信條)로 삼고, 무자기-정신개벽·지상신선 실현-인간 개조, 지상 천국 건설-세계 개벽을 목적으로 한다. 조철제 생전인 1956년에 『태극도통감(太極道通鑑)』을 발행하였으며 사후에 『선도진경(宣道眞經)』, 『수도요람』, 『전경』 등이 편찬되었다.
[묘소]
조철제의 묘소는 부산광역시 사하구 옥천로101번길 2[감천동 10-63]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