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3007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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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炳燮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 |
유형 | 인물/예술인 |
지역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북면 보림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신은주 |
출생 시기/일시 | 192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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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56년 - 김병섭 전국농악대회 개인상 수상 |
활동 시기/일시 | 1964년 - 김병섭 제5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개인상 수상 |
몰년 시기/일시 | 1987년![]() |
출생지 | 상유마을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북면 보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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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국악인|풍물꾼 |
성별 | 남 |
[정의]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출신의 설장구놀이 명인.
[개설]
김병섭(金炳燮)[1921~1987]은 1921년 지금의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북면 보림리에서 태어났다. 풍물꾼으로서 왕성한 공연 활동을 벌였으며 특히 설장구놀이의 명인으로 이름을 떨쳤다. 정읍농악[전북특별자치도 무형유산]의 정착에 크게 이바지하였고, 호남우도농악 판제와 설장구놀이를 공연·교육·보급하고자 노력하였다. 현재도 김병섭류 설장구놀이가 이어지고 있을 만큼 정읍과 서울에서 많은 제자를 양성하였다.
[활동 사항]
김병섭은 11세 무렵, 형이 조직한 풍물단에서 풍물을 처음 접하였다. 김병섭은 처음 김학순과 백남길에게 장구와 쇠를 배웠는데, 김병섭의 스승 김학순은 유명한 법성포 장구재비였다. 김병섭은 강제징용과 만주로의 강제 이주 시기를 겪었으며, 해방 이후에는 고향인 정읍으로 돌아와 풍물굿을 다시 시작하였다. 당시 정읍에는 이봉문, 이정범, 추교동, 유남영 등의 장구 명인들이 있었고, 이봉문와 이정범은 김병섭에게 영향을 주었다. 이때부터 농사보다도 풍물굿을 직업으로 삼아 생활하였고, 6·25전쟁 시기에는 포장걸립[공터에 천막이나 휘장을 담처럼 두른 공연장을 만들고 입장료를 받고 공연하는 형태] 등으로 활동하였다.
1956년과 1964년 전국농악대회에서 정읍농악으로 개인상을 수상하였다. 1959년에는 24명의 전문 풍물꾼과 함께 정읍농악단의 이름으로 전라북도를 대표하여 전국민속경연대회에 출전하여 국무총리상을 수상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정읍농악은 1950년대 말 무렵까지 전국에 명성을 떨쳐 그 기예를 따를 자들이 없다는 평을 들었는데, 당시 장구에 이봉문·신기섭·전사섭 등이 활동하였고, 쇠는 김도삼·전광래·박성근 등, 채상에는 정오동·백남윤·김종수·김진철 등, 고깔소고에는 이조모·황재기 등이 함께하였다.
김병섭은 1960년대에는 여성 농악단의 강사로 활동하면서 단원들과 함께 공연을 연행하였다. 1970년대에는 서울에 정착하여 활발한 공연 활동과 함께 많은 제자를 양성하였고, 1970년대와 1980년대에는 한국국악협회 농악분과 등 농악 관련 조직들에서 여러 활동을 벌였다. 김병섭은 호남우도농악 복원을 위한 작업도 적극적으로 진행하여, 1976년과 1977년에 공식적인 호남우도농악 복원을 위한 공연을 연행하였다.
김병섭의 장기였던 고깔설장구놀이는 김도삼-김학순-이정범으로 이어지는 정읍농악 설장구놀이의 전승 구조를 이어 주는 가교 역할을 하며, 현재 김병섭류 설장구놀이는 제자 박철이 이끄는 김병섭류설장구연구회와 김병섭의 제자 황해경과 최수경 등이 만든 김병섭류설장구보존회를 통하여 활발하게 전승되고 있다.
[상훈과 추모]
1956년 전국농악대회에서 개인상을 수상하였고, 1964년 제5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도 개인상을 수상하였다. 1959년에는 김병섭이 포함된 정읍농악단이 전국민속경연대회에서 우승[국무총리상]을 차지하였다. 정읍시에서는 2022년 2월 ‘정읍시 이달의 역사 인물’로 설장구 명인 김병섭을 선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