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3007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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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政治 |
영어공식명칭 | Politics |
분야 | 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성호 |
[정의]
전북특별자치도 정읍 시민들이 국가 또는 지역 사회의 권력을 획득·유지하는 데 직접적·간접적으로 참여하는 제반 활동과 그 특성.
[개설]
해방 이후 한국 사회의 정치사는 중앙 정치의 패권적이고 독점적인 권력이 행사되는 가운데, 지방 정치는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하는 특징을 지니고 전개되었다. 그런 이유로 지방 정치, 특히 시·군 단위의 정치적 성향이나 영향력을 밝혀 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동안의 정치 과정에서 지역 사회나 지역 주민은 중앙 권력의 세력 속에서 매우 제한적으로 정치적 의사를 표출할 수 있었으며, 그나마 중앙 정치 권력에 의해 동원된 측면이 크다. 한 지역의 정치란 주민의 정치 의식과 정치 참여, 그리고 그 결과로 나타나는 정치적 결과 등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따라서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의 정치 과정을 살펴보려면, 근대 국가 형성 이후 주민들의 정치 의식과 선거에서의 투표 성향뿐 아니라 사회 조직과 정당 활동, 국가와 자치단체의 정책에 영향을 미치기 위한 주민들의 집단 행동 등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중앙 정당의 후보를 대상으로 제한적으로 실시한 선거 행위를 제외하면, 주민들의 정치 활동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광복 이후 정읍시의 정치 상황]
해방 직후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가 의도치 않게 정치적 주목을 받게 된 것은 1946년 6월 3일 이승만이 전라북도 정읍군[현재의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에서 단독 정부 수립을 공식적으로 언급한 발언 때문이었다. 이승만은 남부 지방을 순회하던 중, 전라북도 정읍군에서 “우리는 남방만이라도 임시 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38 이북에서 소련을 철퇴하도록 세계 공론에 호소하여야 될 것이다”라고 발언하였다. 향후 한국 사회의 국가 형태와 관련된 중대한 사안이 전라북도 정읍군에서 언급됨으로써 우리 사회는 논란에 휩싸이게 되었다. 이것이 정읍군 주민의 정치적 성향과 직접 관련된 것은 아니지만, 이후 남한만의 단독 선거를 강하게 추진하는 중앙 정치의 힘이 이승만의 발언을 통하여 지역 사회에 전달된 것은 틀림없다.
정읍시가 정치적으로 주목 받았던 또 하나의 사건으로는 1956년 제2대 도의회 의원 선거에서의 환표 사건을 들 수 있다. 이른바 정읍환표사건은 1956년 8월 13일 실시된 제2대 도의원 선거에서 발생하였다. 선거가 끝난 후, 제2선거구인 전라북도 정읍군 소성면[현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소성면] 투표소의 투표함을 개표장인 정읍군청으로 옮기는 도중에 여당인 자유당[후보 엄진섭]이 무소속 후보 은종숙의 표를 바꿔치기 한 것이다. 정읍환표사건은 투표함 호송 경관이던 정읍경찰서 소성지서 박재표 순경이 동아일보사에 찾아가 표를 바꿔치기 한 사실을 폭로함으로써 세상에 알려졌다. 또한 자유당과 소성면사무소, 정읍경찰서 등이 관련되어 있었다는 사실도 박재표 순경의 폭로로 밝혀졌다. 환표 사건으로 정읍군수, 전라북도 경찰국과 정읍경찰서의 경찰 간부들이 줄줄이 자리를 바꿨지만, 박재표 순경은 직무유기죄로 구속되어 결국 경찰직을 사직할 수밖에 없었다.
이승만의 정읍발언과 정읍환표사건은 지역 정치가 국가 권력과 중앙 정치에 종속되어 있었음을 보여 주는 단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정읍의 정치 현상]
1948년 5월 10일의 제헌 의회 선거에서부터 최근까지 진행된 각급 선거를 돌아보면 정읍시 정치의 지역적 특성과 함께 중앙 정치와 지역 정치의 깊은 관련성을 확인할 수 있다.
전통적으로 한국 사회의 선거에서는 농촌 지역에서 여당 지지율이 높고, 도시에서는 야당 지지율이 높다는 여농야도(與農野都) 현상이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그러다가 1970년대 이후, 특히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부터 영남과 호남 간 지역주의 투표 성향이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지역별로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지역주의 투표 성향은 전국적으로 공통된 현상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1987년 대통령 선거에서부터 지역 감정을 선거에 활용하는 정당들의 정치 전략이 본격화하면서 이른바 지역 패권주의적 투표 성향이 심각하여지기도 하였다.
정읍 시민의 정치적 선택도 대체로 이러한 경향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다만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 전라북도 전체에서는 자유당 이승만 후보의 득표율이 유효 투표의 60%를 넘어서고 있는 데 비하여, 전라북도 정읍군에서는 조봉암 후보가 이승만 후보보다 약 1,000표 이상을 더 얻었다.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민주당의 신익희 후보가 유세 도중 갑자기 사망하는 바람에 진보 성향의 조봉암 후보의 득표율이 높아지기도 하였다.
이처럼 일부 예외적 상황을 제외하면, 지난 70여 년 동안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의 선거 결과는 일반적 경향을 벗어나지 않고 있다. 대통령 선거 결과를 보면 이러한 특성을 확인할 수 있다. 제2대에서 제4대까지 이승만 후보를 대통령으로 뽑았던 정읍 시민들은, 5·16 군사 쿠데타 이후에는 민주공화당의 박정희 후보를 대통령으로 선출하는 데 표를 보탰다. 그런데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른바 ‘여농야도’ 현상이 약화되고 지역주의 투표 성향이 드러나게 되었다. 전라북도에서는 신민당의 김대중 후보가 공화당의 박정희 후보를 압도하는 결과가 전개된 것이다. 그러나 1972년 박정희 정권에 의하여 대통령 직선제가 폐지됨으로써, 지역 사회는 그나마 제한적으로 지니고 있던 정치적 선택권마저 상실하게 되었다. 그리고 6월 항쟁으로 직선제가 부활된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나타난 이른바 지역 감정과 지역 갈등 현상이 전국의 정치 현장을 압도하게 되었다. 이후 2022년 제20대 대통령 선거까지 정읍 시민들은 민주당 후보에 압도적인 지지를 보내고 있다.
지역주의 정치 성향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간단히 정리하면 정읍 시민들은 정부 수립 직후에는 무소속을 선택하고, 6·25전쟁 이후부터 1950년대 기간 동안에는 자유당, 4·19혁명 이후 제5대 선거에서는 민주당 후보를 당선시켰다. 그리고 5·16 군사 쿠데타 이후 1971년 제8대 선거까지는 여당인 공화당 후보를 선택하였다. 그리고 1987년 이후의 선거에서는 압도적으로 민주당에 표를 몰아주었다.
이러한 정치적 선택을 간단히 지역 감정에 의한 지역주의 투표 성향이라고 폄하하기는 쉽지 않다. 오히려 중앙 정치의 집권 전략에 따라 대통령 선거가 직접 선거에서 간접 선거로 바뀌었던 1970년대의 정치적 상황이나, 국회의원 선거를 중선거구제로 전환시켰던 1980년대 집권당의 전략 등은 지역 주민이 가지고 있던 최후의 정치적 권리를 박탈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였다. 이런 점에서 최근 정읍 시민들이 보여 주는 선거에서의 선택은 자신들의 정치적 선택권을 지키려는 최소한의 방어 수단으로서의 의미도 있다고 여겨진다. 게다가 정읍시를 비롯한 농촌 지역은 국회의원 선거 등에서 선거구 통합 여파로 자신들의 정치적 의지를 드러내기가 더 어려워졌다.
최근의 투표 성향을 보면 전북특별자치도의 각 지역 주민들의 정치적 성향은 대체로 중심 도시, 특히 전주권의 여론 추이에 상당한 영향을 받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정읍시는 이러한 지역의 여론, 정치적 흐름으로부터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형성되고 있었음을 보여 주기도 한다. 앞에서 예를 든 것처럼, 정읍 시민들은 3대 대통령 선거에서 진보 성향의 조봉암 후보에게 이승만 후보보다 더 많은 표를 주었으며, 2012년 제19대 총선에서 민주당 후보를 제치고 무소속 유성엽 후보를 당선시키는 등 예외적 상황을 연출하기도 한 것이다.
선거는 지방 정치의 특성과 지역 주민의 정치적 의식을 살펴보는 부분적 지표에 불과하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본 선거 경향을 통하여볼 때, 정읍시의 독자적인 정치 지형을 형성하는 데는 아직 미치지 못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정읍시만의 문제는 아니다. 한국 정치 전반이 중앙 집중적 권력 아래 놓여 있는 것이 현실이고, 이러한 점에서 정읍시도 다른 지역과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다.